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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6. 어떤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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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서른다섯, 한창 젊고 아름다운 한 여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이야기다.
월요일은 엠, 화요일은 튜즈, 수요일은 더블, ..쥬디, ..에프, ..쌈디, 일요일은 썬, 여자는 남자들을 그렇게 부른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한 1이 될까 두려워 여자는 7분의 1로 마음을 나누어 놓았다.  그 정도 지분이라면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변질되고 추해진다는 걸, 온전히 바친 사랑의 결과는 상처투성이라는 걸 어린 시절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자는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랑 따윈 없다고 믿는다.
그런 여자 미주에게 어느 날,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내가 무섭니? 그럼 소리 질러.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르잖아.”

엠은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당장 어떻게라도 할 것처럼 내게 붙어 서 있었지만 손에선 점점 힘이 풀어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오갔지만 구석에 서 있는 우리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큰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천상 애정행각을 벌이는 청춘남녀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었다.

“넌 내꺼야. 내가 하나님한테 받은 선물이야.”

“....”

“넌 내가 찾아낸 사람이야. 내가 기다렸던 사람이라고..”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는 가 싶더니 스스로 감정에 복받쳤는지 손에서 완전히 힘이 풀어졌다.

“내 말 좀 들어, 미주야. 제발....”

“손 좀 놓고 얘기해요.”

내가 몸을 밀쳐내자 잠시 비틀거리더니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미주야. .”

내가 움직이려하자 다시 달려들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그러곤 닥치는 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지 벽으로 나를 밀어붙여놓고는 힘껏 끌어안았다.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한 줄 알아...? 내가 얼마나... 혼자서 외로웠는 줄 알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제발! 이것 좀 놓고... 놓고 이야기하라구요.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숨 막힌다는 말에 엠은 금방 팔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도망갈 거지? 그냥 가버릴 거지?”

한숨이 나왔다.

“따라 올 거잖아요. 또 찾아 올 거구.”

“그래. 끝까지 따라가고 끝까지 찾아낼 거야.”

엠은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말과는 달리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마음만 먹으면 엠을 밀치고 후다닥 뛰어 가버릴 수도 있었다. 소리를 질러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끝을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또 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보니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칼칼하고 반듯했던 엠의 하얀 셔츠도 짙은 푸른색 슈트도 땀에 후줄근해 있었다.

“그러실래요? 난 도망갈 테니 따라다니고, 찾아다니고 그러실래요?”

“미주야...”

“....”

“나... 부탁하나 들어줘....”

“....”

“나 밥 한 끼만 먹여주라.”

부탁...이라고 말할 때 나는 무언가 부담스러운 말이 나올 것 같아 정말 어딘가로 도망을 가야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밥 한 끼...라고 해서 짧은 순간 안도했었다. 하지만 곧바로 거절할 수 없는 진짜 부탁이 뒤를 따랐다. 그야말로 부탁이었다.

“니가 직접 해주는 밥 먹어보고 싶어.”

저녁에 집에 들어가 직접 밥을 해서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밥 잘 하는데 있어요. 거기 가요.”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 내 부탁 들어주면 안 될까.”

짧은 순간 빨리 판단해야했다. 너무 덥고 답답해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부탁이라 해놓고 의외의 답이었는지 눈이 둥그레진 채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기로 해요.”

나는 앞서 걸어가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내 대답이 너무 쉬워서 믿을 수 없었는지 아니면 잘 못 들었나 싶었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엠은 얼른 내 뒤를 따라 승강기에 올랐다.

피할 수 없을 땐 그냥 부딪치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다. 비굴하거나, 비겁하게 굴지 마라. 당당하게 맞서라. 거기서 힘이 나는 법이다. 오빠는, 아버지 그늘에 숨도 못 쉬고 살았던 오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 말에 복종했다.

엄마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건 비겁한 게 아니란 건가, 아버지를 향해 한 마디도 대들지 않고 복종하는 오빠까지 나는 미웠다.

“저녁준비 하는 동안 지하1층 사우나 다녀오면 어때요?”

낮의 단정하고 수려했던 모습이 한참 구겨져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 역시 빨리 집에 들어가 샤워부터 하고 싶었다.

“사우나에서 돌아오면 도망가고 없는 건 아니지?”

“김치찌개랑 계란후라이, 고등어구이가 반찬 전부예요. 괜찮죠?”

낮에 벨타워에서 처음 악수를 청하며 웃었던 이후로 내내 굳어있던 엠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땀에 젖은 옷부터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엠에게 말했던 것처럼 김치찌개를 끓이고 고등어를 구웠다.

다행히 밥을 얼려둔 게 있어 밥은 냉동실에서 꺼내 해동을 해두었다. 얼린 밥을 꺼내다보니 우유팩에 곰국 얼려둔 게 있어 그것도 함께 해동했다.

사우나를 마친 엠은 웬일로 맥주를 사들고 들어왔다. 그러곤 식탁에서 제일 먼저 맥주를 따랐다.

“이렇게 진수성찬이면 매일 저녁 미주집이 생각날 것 같은데 큰일이네.”

엠과 가까운 사이로 지낸 건 1년 반 정도의 일이지만 주로 저녁을 함께 먹었고 영화를 보긴 했지만 술을 자주 마시진 않았다. 엠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원래는 술에 취하는 건 기독교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서른이 되도록 아예 술을 마시지 않아 아직 술 맛을 잘 모른다고 했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나는 맥주를 마셨지만 엠은 마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엠이 술을 마셨고 나는 마시지 않았다.

“왜 미주 집에서 밥 먹겠다했는지 안 물어 봐?”

“우리아버지, 참 멋쟁이셨거든요. 아버지 장롱엔 양복이 한 가득이었어요. 이틀 연거푸 같은 넥타이를 매고 나가시는 일이 없었어요. 구두는 항상 반짝 거렸구요.”

“그런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입원했던 두 달 동안 전에 볼 수 없었던 아버지 모습을 보게 됐어요. 예전엔 반짝거리는 그 모습이 그렇게나 미웠는데...”

“그래, 언젠가 들은 적 있어. 아버지 미워했다는 말....”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건 다 잊히고 병원에서 봤던 초라한 모습만 잔상이 남더라구요. 그래서 가끔 아버지가 덜 미워지기도 했어요.”

“내가 뭔가 가슴 아픈 이야기라도 꺼낼까봐 겁나는 구나. 헤어지고 나서 잔상이 남을까봐.”

그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홀로 보냈던 시간들이 많았다고 했다. 혼자 저녁 먹는 게 싫어서 결혼하면 나아질까 했지만 바쁜 아내 때문에 그것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제일 싫은 게 밖에서 혼자 먹는 밥. 유치원 원장이었던 아내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생활은 점점 윤택해졌지만 오히려 종교를 공부하는 자신은 더욱 빈곤해졌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따뜻한 저녁을 먹는 일, 자신의 결핍은 다만 그것뿐이라고 엠은 늘 말했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하고 헤어질 땐 홀가분히 가볍게 헤어지고 싶었다. 서로 팽팽하게 맞잡고 있을 때 사랑이지 둘 중 하나가 놓아버리면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 이미 두 달 전 엠은 나와 잡았던 줄을 먼저 놓았고 나는 다시 팽팽하게 맞잡을 생각이 없었다.

“정말 헤어지면 이제 다시 안 볼 거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엠은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시간이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더 늦기 전에 일어서야하지 않냐고 말을 하려는데 동시에 엠이 말했다.

“나, 너 한번 만... 안아보면 안 될까?.”

낮의 그 서늘한 눈빛이 기억이 났다. 나를 야유하다시피 하면서 바라보던 눈빛이었다.

“한번 만 너를 품게 해줘.”

“....”

“이제 안 만나 주면 내겐 더 기회가 없잖아. 정말 너,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

내가 식탁에서 일어서자 엠이 따라 일어섰다. 빈 그릇을 치우려는데 엠이 막아섰다.

“이러려고 내 집에서 밥 먹자고 한 건 아니잖아요. 이러지 말아요.”

“마지막이니까. 니가 정해놓은 규칙 같은 거 깨면 안 되니? 이제 다시 안볼 거잖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엠이 내 손을 잡았다.

“너랑 자고 싶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헤어지면서 이러는 건 정말 비굴하고 비겁한 거예요.”

“그렇지만 내게 너는 오래 남겠지. 너와 보낸 하룻밤이 잊을 수 없는 잔상으로 남겠지.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해.”

“돌아가세요.”

엠은 억지로 나를 껴안았다. 그러곤 내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키스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한번만 제발....”

엠이 나를 번쩍 들어 소파에 데려다 앉혔다.

“그래요. 맘대로 해요.”

엠은 내 말에 놀랐는지 우뚝 멈추었다.

“진심이야? 그래도 돼?”

“그래요. 그런 마지막을 원한다면 하는 수 없죠.”

내 말이 믿기지 않았는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만나면서 이제까지 가능하지 않았던 게 지금 어떻게 가능한 거지?”

“이제 만나지 않을 거니까요. 이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거짓말. 어떻게 좋아하지 않는데 그게 가능하냐고.”

“상관없잖아요.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니까 선생님 부인한테 미안할 것도 없고 죄의식도 없을 거니까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나 안 좋아한다고?”

“네.”

“전엔 나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우리 서로 사랑했었잖아.”

“전엔 그랬죠. 전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안으라고...? 그러면 내가 포기할까봐 일부러 그러는 거지? 실망했을 수는 있지만 갑자기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 거잖아. 어떻게 사람이 금방 좋아하는 마음이 아닌 게 될 수가 있지?”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어요. 정말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갑자기 엠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일어섰다. 눈에 물기가 비쳤다.

“미주야...”

“....”

“만일 이대로 아무 일 없이... 그냥 아무 일 없이 멈춘다면... 나, 다시 만나 줄 수 있니?”

“....”

“다시는 너한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게. 그 어떤 것도 내 맘대로 하지 않을게. 다시 시작하고 싶어. 제발... 제발 그렇게 하겠다고 해줘.”

이제껏 그렇게 절박한 엠의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럴게요. 내일아침 일어나서도 똑 같은 생각이면 그렇게 해요. 어서 가세요.”

엠은 고갤 끄덕이며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생각 난 듯 돌아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이순간이 절박할 뿐 문을 나서면 홀가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엠은 현관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문을 열려다 잠시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거 기억하고 있니? 우리 함께 읽었던 책, 침묵...”

침묵. 엔도 슈사쿠가 쓴 책이었다. 우연히 자신의 길에 회의가 들었던 어떤 시절에 그 책을 읽었다고 했다. 힘들게 그걸 읽고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했었다. 내게 읽게 해주고 싶다고 나와 함께 다시 읽어보고 싶다고 내게 책을 사준 적이 있었다.

함께 읽었고 오래오래 토론했었다. 나는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종교를 논하기 전에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가 독백했던 말....”

“....”

“죄란, 보통 생각하는 것 같이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일이 아니었다. 죄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인생 위를 통과하면서, 자기가 거기에 남긴 발자국을 잊어버리는 일이었다.”

“....”

“내가 아무리 너한테 잘못했어도, 네가 아무리 나를 비난해도, 죄를 지은 사람은 너야. 내 인생 위를 통과하면서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 너니까. 그렇게 해놓고 너는 그걸 잊어버렸으니까.”

아버지가 엄마를 혼자 두고 집을 나갈 때 문 닫히는 소리가 그랬었다. 가슴이 떨어지는 소리. 무슨 이유인지 엠이 내 집의 현관문을 나가는데 똑같은 그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 가슴이 함께 떨어졌다. 쿵.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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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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