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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부시에게 "북한과 대화는 우리가 한다, 미국은 여건만 만들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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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24년 전인 1992년 8월 24일. 한국의 노태우 정부는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6·25 전쟁이라는 과거사를 덮고, 대만과의 단교라는 아픔을 무릅쓴 결정이었다. 한국은 중국 너머로 한반도 통일과 21세기 경제부흥을 바라봤고, 중국 역시 한국 너머로 아편 전쟁 이후 150년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와 부흥하는 중국을 그렸다. 그야말로 ‘윈.윈’ 전략. 한·중 수교는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 도미노가 한창이던 1990년, 대(對) 소련 수교에 이은 ‘노태우 북방정책’의 결정탄이었다.

20년 전 북한 개방 노렸던 '노태우 한·소 수교작전'

중국은 지금 인구 13억5600만, GDP 11조3800억 달러(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G2의 힘을 구가하고 있고, 한국도 국제무대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헌데, 2016년 여름의 한·중 관계는 근래 최악의 상황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THAAD)체계의 한반도 배치와 관련한 중국의 태도로 반중(反中) 내지는 '중국 다시 보기' 분위기도 생겨나고 있다.

2010년 11월 한소 수교 20년을 맞아 중앙선데이에 게재한 '북방정책 재발견' 기획 기사를 꺼내 다시 소개하는 이유다. 국제질서 대변혁의 시기에 선제적으로 대담하게 펼친 한·소 및 한·중 수교 과정이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과의 관계는 물론, 불확실성에 빠진 남북관계 해결에 전략적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함께.

1990년 9월 6일 청와대 영빈관. 가을이었으나 하늘은 꾸물거렸다. 1차 남북고위급 회담 참석차 서울에 온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2005년 사망) 총리 일행이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했다. 노재봉 대통령비서실장,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배석했다. 노 대통령이 환영 인사를 건넨 뒤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그래, 부탁할 것은 없습니까.”

연형묵 총리=“임수경양을 풀어주십시오.”

임수경은 89년 동베를린을 거쳐 북한에 밀입국했다. 평양축전에 참가했으며 김일성을 만났다. 판문점을 통해 귀국한 뒤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죄로 수감됐다.

노 대통령=(환하게 웃으며) “그 아이는 그쪽에서 부탁하기 전에, 내 딸이오. 나한테 맡겨놓으시오.”

연 총리=“감사합니다.”

노 대통령=“다른 부탁은 없소?”

연 총리=(잠시 사이) “유엔 가입을 보류해주십시오.”

88년 남북 고위급 회담 제안 이후, 92년까지 남북한 총리는 일곱 차례 서울과 평양을 오갔다. 91년 말엔 남북관계 장전이라 불리는 ‘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소련과 중국, 동구 사회주의가 해체되면서 남북한에 엄습한 미증유의 불안이 한반도의 리더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강요했다. 불안의 먹구름 속에 북방외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노 대통령의 5년 재임(88년 2월~93년 2월) 동안 외교안보 참모로 활동한 김종휘 당시 외교안보수석의 회고.

6공의 북방정책은 미수교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파티나 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아스피린 한 알씩만 팔아도 십수억 개가 팔리는 시장 아닙니까.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도 마찬가지예요. 경제적 요구도 있었지만, 기본 철학은 통일 시대를 대비하는 것이었어요. 북한을 지원하는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김일성을 압박해 개방의 길로 이끌어내자는 것이었죠.”

그는 이어 “노 대통령은 21세기가 되기 전에 통일이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통일 한국에 유리한 국제 질서를 만드는 게 북방외교의 목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수석은 노태우 대통령의 이른바 북방외교 3단계론을 말한 것이다. 북방외교 3단계론이란 ①소련·중국 수교를 통한 대북 압박 ②한국 중심의 한반도 통일 ③시베리아(연해주)로 한민족 공동생활권의 확대를 뜻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민족통일로 가는 길을 열겠다”고 밝힌 이래 북방외교는 거침없었다. 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퇴임 직전 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수교할 때까지 5년간 37개 공산권 국가와 새 장을 열었다. 18년간 90여 개국과 수교한 박정희 대통령을 능가했다.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 드라마엔 노재봉 총리, 최호중·이상옥 외무장관, 공로명 주 소련 영사처 대표, 김종휘 외교안보수석, 김종인 경제수석, 박철언 정무장관, 노창희 외무차관, 권병현 대중 실무교섭대표(당시 직책) 등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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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 수교 3개월 뒤인 90년 12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모스크바 세레메체보 공항에 도착, 메드베제프 소련 대통령위원회 위원의 영접을 받으며 3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건국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소련 땅을 밟았다.

1990년 5월 21일부터 6월 4일까지 2주일은 한·소 수교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한·소 양국은 그 6개월 전 영사처 설립에 합의했지만 정작 수교 논의엔 한 치도 못 나아가고 있었다.
5월 20일 아나톨리 도브리닌(2010년 4월 사망) 고르바초프 대통령 외교 고문이 서울에 왔다. 전직 국가수반회의(IAC) 총회 참석이 방한 명분이었지만 그는 고르바초프의 수교 밀사였다. 도브리닌은 케네디 때부터 레이건 대통령 때까지 20년 이상 6명의 미 대통령을 거치며 주미대사를 역임한 베테랑 외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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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6월 4일 미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에서 열린 제 1차 한·소 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환담하고 있다. 당시 소련 군부에 정상회담이 공개되는 것을 꺼린 고르바초프 대통령 측은 현장에서 단 세 컷의 사진만 찍도록 했다. 가운데는 김종휘 외교안보 수석.

5월 21일 오후 2시, 신라호텔에서 김종휘와 도브리닌이 만났다. “6월 4일 샌프란시스코 소련 총영사관에서 회담이 가능하다. 경제협력을 먼저하고 수교는 천천히 하자.” 도브리닌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날 저녁 김종휘 안보보좌관과 노재봉 대통령 비서실장은 도브리닌을 서울 압구정동의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도브리닌은 모스크바로 전화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서울~모스크바 회선이 적어 통화 신청을 해도 며칠이 걸릴 때였다. 노 실장이 체신부에 연락해 회선을 확보해줬다. 도브리닌은 고르바초프의 비서실장과 통화했다.

“Everything is all right, Go!” 통화가 끝난 뒤 도브리닌은 보안 유지를 강하게 주문했다. “우리 외무부, 군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군부가 반발하면 무산될 수도 있다.”

“아관파천 연상, 영사관 정상회담은 안돼”

22일 오후 4시. 도브리닌이 청와대 상춘재로 노 대통령을 예방했다. ‘소련은 한국과 수교할 의사가 있다. 워싱턴에서 열리는 미·소 정상회담을 전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날 용의가 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당시 러시아어 통역이 없어 영어로 면담이 진행됐다. 당시 배석한 인사는 “도브리닌의 영어 실력이 신통치 않아 많이 놀랐다”고 했다.

사흘 뒤 노재봉 실장이 도브리닌을 만났다. 노 실장은 정상회담 장소로 소련 측이 제안한 샌프란시스코의 소련 총영사관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구한말 민비 시해 사건 뒤 고종이 피난한 곳이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한국민에게 ‘아관파천’을 연상시키는 총영사관은 곤란하다”고 했고, 도브리닌은 “레이건 전 대통령도 총영사관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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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6월 7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오른쪽)과 8일자 아사히신문(왼쪽)에 실린 만평. 6월 4일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과 5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등 긴박한 외교전에서 소외된 일본 정부를 비판한 내용이다. 방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고르비상 볼 패스”라고 요청하는 사람은 가이후 도시키 당시 일본 총리.

노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이병기 의전수석의 증언. “대통령의 명을 받아 5월 28일 비밀리에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습니다. 고르바초프가 페어몬트호텔에서 4시간 동안 쉬다가 출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호텔 23층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예약하려 했는데, 이미 레이전 전 대통령 부부 이름으로 예약이 돼 있더군요. 레이건 때 국무장관을 한 조지 슐츠와 친한 김종인 경제수석에게 SOS를 쳐 레이건 대통령의 예약을 취소했습니다. 회담 장소를 총영사관이 아닌 곳(페어몬트호텔)으로 확보한 뒤 소련 측과 협상하려는 계획이었죠.” 이런 과정을 거쳐 한·소 정상회담 장소는 총영사관에서 페어몬트호텔로 변경됐다.

회담 하루 전인 6월 3일. 민병석 비서관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메모했다. “6월 3일,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페어몬트호텔로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 대사와 함께 노 대통령을 예방했다. 솔로몬 차관보는 ‘한·소 정상회담을 기꺼이 환영한다. 다만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북한이 노 대통령 전용기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회담 당일의 메모는 이렇게 돼 있다. “4일 오후, 정상회담이 예정보다 늦게 시작됐다. 오후 5시15분쯤 노 대통령이 회담장으로 떠났다. 모든 것은 노 대통령 1인 손에 달렸다.”

레이건이 예약한 방서 한·소 정상 만나

고르바초프는 마슬류코프 경제담당 부총리(정치국원), 도브리닌 고문, 체르냐예프 안보 보좌관, 말케비치 상공회의소장을 데리고 회담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북한 얘기를 먼저 꺼냈다. 협상 지렛대로 북한 문제를 올린 것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우리는 북한의 고립을 원치 않는다. 김일성 주석에게 전해줄 말이 있는가.”

▶노 대통령=“북한이 개방하도록 소련이 적극 협조해야 한다. 우린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 얼마 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소련 주간 행사에서 소련 보드카가 일찌감치 매진됐다. 양국 관계 발전의 청신호 아닌가.”

▶고르바초프=“(웃음) 한국 보드카, 소련 보드카 맛이 어떻게 다른가.”

노 대통령이 마침내 외교관계 수립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훌륭한 생각이지만 시간을 달라. 우리 속담에 얼음이 녹아 대하(大河)로 흐른다는 말이 있다.”

▶노 대통령=“우리 속담엔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다.”

▶고르바초프=“과실이 잘 익도록 성숙시키자.”

▶노 대통령=“나는 동양에서 잘 기다리는 사람으로 이름나 있다. 내가 잘 익었다고 말할 때 먹으면 틀림없이 맛이 있을 거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김종인 수석은 “고르바초프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측 수행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내가 경제보좌관이라니까 내 손에 든 파일을 탁 치면서 ‘파일이 이렇게 얇으냐’고 그러더라. 경제 협력에 대한 절실함을 반영한 거 아니겠나”라고 회고했다.

노 대통령은 한·소 정상회담 직후 워싱턴으로 넘어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회담했다. 김종휘 수석은 수개월 전부터 솔로몬 차관보에게 “한·소회담이 실현될 경우 한·미 정상회담도 이뤄져야, 한·미 양쪽에 다 좋은 일”이라고 설득해왔다. 김 수석은 “북방 외교를 추진하면서 오랜 동맹인 미국과의 신뢰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데 신경 썼다. 북방 외교의 목표, 지향점을 분명히 설명했고 미국이 상당 부분 도와줬다”고 했다. 부시 대통령은 5일 예정된 그리스 총리와의 회담을 뒤로 미루고 노 대통령과 만났다.

고르비 “경협 파일, 왜 이리 얇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두 달 뒤인 8월 2일. 김종인 경제수석을 단장으로 수교 협상 대표단이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의 백화점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이던 소련은 ‘돈’이 급했다. 협상 상대는 마슬류코프 경제담당 부총리. 김종인 수석은 “우리가 당신 같은 수퍼파워와 약속을 안 지키고 어떻게 생존하겠나. 우리는 국민과 국회가 있다. 수교를 먼저 한 뒤 경협을 해야 한다”고 했다. 마슬류코프는 사무실에서 대낮부터 보드카를 계속 부어댔다. 승강이 끝에 마슬류코프가 대통령실로 전화한 뒤 “수교를 먼저 하라. 경협자금은 나중에 받아도 된다는 허락을 얻었다”고 말했다. 91년 1월 1일로 예정된 수교일이 9월 30일로 당겨졌다. 공식 수교 절차는 양국 외무장관의 몫이다. 9월 하순 45차 유엔 총회 리셉션장에서 최호중 외무장관이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을 만나 “할 거면 빨리 하자”고 재촉했고, 셰바르드나제는 “그러자”고 순순히 응했다. 셰바르드나제는 그 며칠 전 한·소 수교 사실을 통보하러 북한을 방문했다가 평양 측으로부터 모욕적 언사를 듣는 등 수모를 당한 불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88올림픽 조직위 맡으며 북방외교 시동

‘노태우 북방외교’는 그가 83년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시동이 걸렸다. 그때 한국 외교의 목표는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을 모두 88서울 올림픽에 참가시키는 것이었다. 불참을 종용하는 북한과 외교전이 치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2010년 4월 사망)과의 친분을 이용해 수많은 동구권 인사들을 만났다. 당시 보좌관으로 일한 이병기 수석은 “외교·경제 분야 관계 개선이 힘드니까 우선 체육으로 물꼬를 트겠다는 게 올림픽 외교의 포인트였다”고 했다. 88년 2월 취임한 노 대통령은 박철언 정책 특보(후에 정무장관)와 김종휘 외교 보좌관(후에 외교안보 수석), 두 라인을 각각 가동하며 소련과 중국, 동구권의 벽을 뚫기 시작했다. 수십 차례 소련·중국·헝가리·체코· 베트남 등 미 수교국을 드나든 ‘북방외교의 프런티어’ 박철언 특보는 헝가리가 공산권 최초로 우리와 수교(89년 2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90년 4월 정무장관직을 그만두고 정계로 나간 뒤 북방외교는 ‘청와대 기획, 외무부 실무’ 프로세스로 진행됐다.
88년 서울 올림픽은 한·소 수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 전문 언론인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에서 당시 소련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2억의 소련인들이 올림픽 개막식과 서울의 발전상을 지켜봤다. TV는 매일 14~16시간씩 올림픽을 중계했다. 소련인들은 한국인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소련의 올림픽 취재단장 비탈리 이그나텐코는 서울에 도착한 뒤 ‘21세기의 문을 열고 들어선 느낌’이라고 했다.”

88년 7월 7일. 노 대통령은 “북한이 미국·일본과 관계 개선을 한다면 협조할 의지가 있으며 우리도 소련·중국과 관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의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 선언’을 발표했다.

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 고르바초프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한반도 상황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국과의 경제 관계를 공고히 하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연설을 했다. 청와대는 7·7 선언에 대한 화답으로 받아들였다. 김종휘 수석은 “당시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심각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시베리아 투자를 바라고 있었고, 이를 위해 북방 영토를 테이블 위에 놓고 거래를 하고자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우리와 수교함으로써 일본 측의 경계심을 유발할 복안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오버도퍼는 올림픽이 끝난 뒤 소련 상황을 『두 개의 한국』에 소개했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88년 11월 10일 처음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카멘체프 부총리는 정치국 회의에서 ‘한국은 극동지역에서 가장 유망한 경제 파트너다. 관계 정상화를 서두르지 않으면 실기할 수도 있다’고 했다. 고르바초프와 정치국은 카멘체프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소련 지원 끊겨 북한군 훈련 못해

수교 뒤 협상에서 경협자금은 총 30억 달러로 결정됐다. 91년부터 3년에 걸쳐 15억 달러는 한국 소비재 수입을 위한 차관으로, 10억 달러는 현금 차관, 나머지 5억 달러는 플랜트 지원이었다. 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30억 달러 가운데 14억7300만 달러가 지원됐다.

93년 들어선 김영삼 정부 인사들은 ‘러시아 수교를 돈 주고 샀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러시아에 대해 빚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김종휘 수석은 이에 대해 “지금도 어려운 나라들에 원조를 하지 않습니까. 차관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비난도 있지만 한·소 수교로 얻은 안보 이익, 경제 이익은 막대합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는 마슬류코프 경제부총리를 만났을 때 자신이 한 얘기를 들려줬다. “나는 차관 제공에 찬성하지만 소련이 북한에 군사 원조를 계속한다면 차관 반대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죠. 마슬류코프가 자기 책상 위의 서류를 보여주며 ‘북한이 보낸 T-80 전차 지원 요청서다. 이것부터 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소련은 그후 미그-29기와, 최신형인 수호이 전투기, 미사일 등 대북 무기 지원을 중단했다. 우호적인 가격으로 북한에 제공되던 유류와 식량 지원도 거의 중단됐다. 92년 11월 소연방 해체 후 러시아 대통령으로 방한한 옐친은 노 대통령에게 “대북 군사지원을 중단했다”는 말을 거듭하며 “소련·북한 간 상호원조조약 제1조 ‘군사자동개입’ 조항도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북한~소련 간 군사동맹이 깨진 것이다.

김종휘 수석은 “북한이 90년대 이후 유류 부족으로 비행 훈련을 하지 못한다는 분석이 있지만, 실상은 소련의 부품 공급 중단이 더 큰 이유”라고 했다.

소련 해체 뒤 러시아는 현금 대신 러시아산 헬리콥터, 탱크, 미사일 부품 등 방산물품으로 빚을 갚았다.

수교를 너무 서둘렀다, 돈으로 샀다 등의 지적에 대해 김 수석은 “한·소 수교 1년 뒤인 91년 8월 고르바초프는 쿠데타로 실각하고 국내 정치적 입지도 무너졌다. 그때 수교를 서두르지 않았다면 당시 소련 사정을 봤을 때 몇 년이 지나서야 수교가 됐을 것이다. 중국과도 수교가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 땐 북한 도발 없었다”

노태우의 북방외교는 시정 목표였던 ‘민족 자존’ ‘남한의 주도적 역할론’과 맞물려 돌아갔다. 서울 시내 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추진했고, 미군 소유였던 내자동 호텔(현 경찰청)을 돌려받았다. 평시작전지휘권도 돌려받았다. 국방부와 외무부, 청와대 일부 인사들은 반대했다. 김종휘 수석의 얘기다. “용산기지 이전은 대통령이 추진하라고 했습니다. 미국 쪽은 제임스 릴리 주한 미대사부터 설득해나갔습니다. 릴리 대사가 이임할 때 노 대통령을 예방해서 하는 얘기가, 자기는 서울에 와서 한번도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했어요. 서울 한복판 미8군 골프장(현재 용산공원)에서 쳐야 하는데, 한국민들이 곱게 보지 않을 것 같았다는 거죠.”

노태우 정부 시절 북한의 도발은 없었다. 잠수함 침투 사건도, 서해상 무력 시위도 없었다. 김종휘 수석은 “북한이 우리의 북방외교로 엄청난 안보적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 회담할 때 ‘남북대화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겠다. 미국은 여건이 조성되도록, 또 지속되도록 협조해 달라’는 말로 시작했다”고 전했다. 김 수석은 “우리는 북한이 미국·일본과 관계 개선을 추진할 경우 협조하겠다고 겉으로는 유화적으로 얘기했지만, 사실은 미국·일본이 북한과 직접 대화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92년 1월 북한 김용순(2003년 사망) 노동당 국제부장과 아널드 캔터(2010년 4월 사망) 미 국무부 차관 회담만 하도록 허용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화하게 되면 북은 남으로부터 물질적 이득만 취하고 결국 미국만 상대하려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뒤 북한이 미국과 직통하는 것을 막았더라면 남북 관계는 진전했겠죠.”

90년 9월 가네마루 신(金丸信·96년 사망) 일본 자민당 부총재가 방북한 뒤 청와대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김 수석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김일성의 환대에 취한 가네마루가 북한의 대변자 같은 얘길 하는 겁니다. 노 대통령은 완곡하게 표현은 했지만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입장을 전했죠. 저도 “북한과 남한 가운데 선택하라”고 강하게 얘기했어요.”

90년 말 한·소 수교가 마무리되면서 북방외교의 다음 타깃은 중국으로 정조준됐다. 한·소 수교를 지켜본 중국의 자세도 점차 적극적으로 바뀌어갔다. 소련한테 한 번 당한 북한은 중국의 변신에 대해 소련만큼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노태우 북방외교는 선제적이고 전략적이었다. 소련·중국과 접근하면서 미국에 충분한 사전 설명을 했고, 북한의 미국 접근은 은밀히 차단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한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는 게 북방외교 참여자들의 얘기다.

김수정 국제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도움말 주신 분 및 참고 자료

노재봉 전 총리,김종휘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종인 전 경제수석, 손주환 전 공보처장관, 현홍주 전 주미대사,이병기 전 의전수석, 민병석 전 외교안보비서관, 신정승 전 주중대사

『10가지 외교이야기(外交十記) 』『두개의 한국 -The Two Koreas』『제6공화국 실록』『대사관,순간의 기록』『노태우 육성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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