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받는 중국 ‘통화 굴기’…SDR 표시 채권 데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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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화 패권이 도래할 것인가. 세계은행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특별인출권(SDR) 표시 채권을 발행한다고 지난 12일 밝혔다.

IMF 회원국 무형의 통화…세계은행, 중국서 첫 발행
시진핑, 위안화 위상 높이고 달러 힘 빼기 본격화
시장 개방과 당국 개입 ‘모순’…흑자도 국제화 걸림돌

SDR은 국제통화기금(IMF) 회원국이 긴급할 때 IMF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는 권리. 무형의 통화이기 때문에 액면가는 SDR로 표시되지만 결제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가 사용된다. 세계은행은 이 SDR 채권을 거래할 수 있는 통화로 위안화를 선택했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중국의 역할 증대를 지원하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남겼다. 규모는 20억 SDR(약 28억 달러)밖에 안 되지만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는 중국으로선 의미 있는 일보다.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전략은 미 달러의 영향력을 낮추고 국제결제통화를 다변화하는 한편 위안화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데 있다. 위안화를 국제결제통화로 격상시키면 수출입의 환율 변동에서 자유로워지는 등 중국 중심의 ‘게임의 룰’을 만들 수 있다. SDR 채권 발행은 이 전략의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금융기관과 중국 정부가 위안화 결제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위안화의 유통을 활성화하겠다는 복안이다. 중국은 정부계 은행을 이용해 이달 중 3억~8억 달러 규모의 SDR 채권도 발행한다. 다음달 4~5일 항저우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염두에 둔 조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국제통화로서 위안화의 ‘실적’을 알리고 싶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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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블룸버그·니혼게이자이·국제금융센터

사실 중국도 이런 속내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달러 패권에 숨죽이고 있는 국제기구와 유럽연합(EU)·영국 등의 동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관건은 국제사회에서 ‘위안화를 안심하고 써도 좋다’는 신뢰를 심어주는 일이다. 중국은 정책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고 있어 투자에 위험이 뒤따른다. 이 때문에 SDR 채권 발행은 IMF의 공신력을 이용해 일종의 ‘경력’을 쌓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SDR은 각 구성통화의 가중치에 따라 가치를 매기기 때문에 SDR 채권은 구성통화의 일부가 평가절하돼도 손실이 제한된다. 예컨대 위안화로 결제하는 SDR 채권을 매입한 경우 위안화 가치가 100% 하락해도 채권의 가치에는 위안화 가중치인 10.92%만 반영된다. 허인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실상 거래가 어려운 SDR과 위안화를 묶어 시장성이 있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위안화 국제화의 첫걸음”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20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둔 시진핑 지도부는 2020년까지 위안화를 ‘교환할 수 있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통화’로 만들겠다는 목표다. 최근 위안화 국제화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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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블룸버그·니혼게이자이·국제금융센터

실제 글로벌 위안화 결제 비중이 1.72%(6월 기준)까지 치솟는 등 위안화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신호다. 사용량 증가와 더불어 시장의 신뢰를 등에 업으면 국제통화로서 영향력이 단숨에 성장할 것으로도 기대된다. 이윤석 금융연구원 국제금융연구실장은 “위안화 거래가 늘어나려면 민간에서의 사용이 늘어나야 하며 신뢰 문제가 걸림돌이었다”며 “무역 등 실물이 뒷받침하는 가운데 금융 부문이 확대돼야 위안화가 독립적으로 국제통화로 일어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전략은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위안화의 신뢰 제고를 위해 당국의 개입을 자제하고 시장을 개방하면 위안화 가치 및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8월 인민은행이 위안화를 절하하자 위안화 가치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4조 달러에 달했던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3조2000억 달러까지 줄었다. 당국이 달러를 풀어 외환시장에 개입했다는 정황 증거다. 특히 2015년 11월~2016년 1월에는 매달 1000억 달러씩 감소했다. 이런 외환보유액 감소는 중국의 대외신인도에 악영향을 준다. SDR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SDR 채권을 발행했다고 해서 위안화의 신용이 상승했다고 보기 어렵다.

중국 당국은 SDR 채권 발행을 결정한 7월에 광저우·상하이·베이징 등 대도시 은행을 대상으로 외환매매 조사표 제출, 해외 송금 사전보고 등 강도 높은 외환 관리책을 시행했다. 위안화 국제화의 욕망과 현실적 한계가 부딪힌 셈이다.

또 중국이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점도 위안화 국제화의 걸림돌이다. 미국은 레이건 정부 시절 쌍둥이 적자로 전 세계에 달러화를 공급,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중국은 현재로선 미국보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해 위안화 확산에 한계가 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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