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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적대적 공생하는 박근혜와 문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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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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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이하 경칭 생략)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환상의 카드다. 친박 좌장인 서청원이나 친박 실세인 최경환을 뛰어넘는다. 이정현은 “나처럼 근본 없는 놈을 발탁해준 박 대통령께 감사한다” “나를 박 대통령의 내시(內侍)라고 불러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보통 사람이면 낯 뜨거워도 이정현에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전당대회 직전 터진 ‘KBS 보도 외압’ 녹취록도 뜻밖의 호재였다. 그의 충성심을 보증하며 친박을 결집시켰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박근혜 총재 시대가 개막됐다”며 ‘새누리당=도로 친박당’임을 꼬집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엄청 좋은 모양이다.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은 “많은 사람이 행복해하고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행복해한다”는 뜻이다. 지난 11일 새누리당의 청와대 오찬 직후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도 “(박 대통령이) 이렇게 많이 웃으신 건 처음”이라고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이 대표가 좋아하는 냉면과 호남 별미인 능성어 요리를 대접했다. 기분이 너무 좋았던지 값비싼 송로버섯과 캐비아까지 내놓아 구설에 올랐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과 친박에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따로 없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 인사를 만났다. 그는 “이정현 당선의 또 다른 수혜자는 문재인”이라며 “27일 전당대회에서 김상곤 후보가 당선될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더민주 예비경선에서 송영길 후보가 컷오프된 배경도 색다르게 해석했다. “송영길은 친노 핵심인 이호철(노무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선거본부장이었는데도 떨어졌다. 더 놀라운 건 불과 열흘 전에 출마 선언한 김상곤이 예비경선을 통과한 점이다. 그것도 압도적 1위라는 소문이다. 물밑에서 친문 세력이 똘똘 뭉쳐 민 것이다.” 당의 주류가 친노에서 친문으로 빠르게 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친박과 친문은 공통된 DNA가 있다. 이분법적 사고와 편가르기가 그것이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한번 ‘배신자’로 찍히면 끝이다. 더민주 고위 인사는 “추미애 후보가 ‘노무현 탄핵은 내 마음의 상처’라 애걸하지만 ‘배신’의 낙인은 쉽게 안 지워진다”며 “오히려 ‘나는 한번도 친노·친문을 해본 적 없다’는 김상곤의 자신감이 더 돋보인다”고 말했다. 유일한 호남 출신인 데다 물밑에서 친문 세력의 지지를 자신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친박의 결집이 친문의 결집을 부르고 있다.

 만약 김상곤이 더민주의 당권을 잡으면 친박과 친문이 가파르게 대치할 수밖에 없는 구도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꿈”이라던 이정현은 박 대통령의 호위무사다. “사드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정해야 한다”는 김상곤도 “박 대통령의 탄핵까지 생각해야 한다”며 각을 세우고 있다. 당·청 관계야 밀월이겠지만 여야 관계는 언제 파탄 날지 모른다. 또한 친박은 대권 후보가 없는 불임 계파다. ‘반기문 대망론’에 매달려야 할 운명이다. 이에 비해 친문은 문재인의 앞길에 어떤 방해물도 용납 않을 분위기다. 인위적인 ‘문재인 후보’ 굳히기에 들어갈 기세다.

 영화 ‘검은 사제들’은 이탈리아 신부 두 명의 대화로 시작된다. “악령은 왜 숨어 있는 겁니까?”(젊은 신부), “악령이 자신의 존재를 들키면 인간들이 신을 믿어버리기 때문이지.”(늙은 신부) 악령과 신은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것이다. 친박과 친문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친박은 없다” “친문도 없다”며 스스로를 숨긴다. 의도적으로 상호 불신과 증오도 부추긴다. 상대방의 극단적 주장을 핑계 삼아 자신의 극단적인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도 닮았다.

 이런 적대적 공생관계가 내년 대선까지 이어질까? 그동안 수많은 정치 실험이 양당 프레임과 전략적 투표 아래 묻혀버렸던 게 사실이다. 이번에도 여권의 김무성·유승민·오세훈과 야권의 안철수·김부겸·김종인 등이 가만히 앉아서 당할까? 어쩌면 친박-친문의 대치가 가팔라질수록 정치판의 중도를 향한 지각변동 마그마는 더 부글부글 끓어오를지 모른다. 가끔 역사는 굴러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가기도 한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