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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환상 편의점 #1. 사랑의 묘약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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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편의점 #1. 사랑의 묘약 (1)

“이제 그만 좀 해. 너 정말 지긋지긋해!”

정현의 격앙된 목소리가 민영의 머릿속에 천둥처럼 울렸다. 민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지긋지긋하다고?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린 그녀의 가느다란 팔에는, 세탁기에서 막 꺼낸 정현의 옷가지들이 가득 안긴 채였다. 옷에선 은은하게 섬유 유연제 냄새가 풍겼다. 그중 셔츠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민영이 작년, 정현의 생일에 선물한 셔츠였다. 민영은 움찔 놀라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다. 그때 정현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나머지 옷들마저 우수수 흘리고 말았다.

민영은 바닥에 떨어지는 옷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 다 새로 빨아야겠네.”

정현은 민영을 잡아 흔들면서 외쳤다.

“내가 싫다고 했지? 그만 만나자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남의 집에 와서 빨래를 하고 있느냐고! 너 미쳤어? 너 스토커야?”
민영의 가냘픈 몸은 돌풍을 만난 억새처럼 흔들렸다.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하지만 오빠는……. 가만히 두면 몇 주고 몇 달이고 빨래를 안 하니까, 그래서…….”

“이런 썅!”

정현이 그녀를 확 밀쳤다. 민영은 팔을 흔들며 버둥거리다가, 그의 옷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팔꿈치를 바닥에 호되게 찧어 몹시 아팠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팔이 아파서 우는 거야.’
정현은 그런 민영을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남이야 빨래를 하든 말든, 옷이 썩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못 알아듣겠냐? 이제 우린 남이라고.”

“……오빠.”

“이번에는 현관 비밀번호를 안 바꾼 내 잘못이라고 칠게. 또 멋대로 기어 들어와서 이러면 불법 가택 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민영은 말없이 옷가지를 끌어 모았다.

불법 가택 침입, 경찰, 신고.
이런 무서운 단어들이 마음을 후벼 팠다. 하지만 제일 큰 상처를 준 말은, 우린 남이라는 한 마디였다.
옷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팔꿈치가 너무 아파서 우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정현은 한동안 말없이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막대사탕의 대롱처럼 가느다란 담배였다. 냄새도 덜 독하고 향긋했다. 그는 민영과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애연가였는데 저런 담배를 피우는 건 처음 봤다. 취향이 바뀌었나?

정현이 다용도실 천장을 향해 후 하고 담배연기를 한 번 내뿜었다. 그러더니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듯, 한층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민영아. 강민영. 그만하자. 계속 이러면 피차 괴로울 뿐이야.”

민영은 울면서 오피스텔을 나왔다. 몇 년 째 드나들다 보니, 이제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경비원이 무슨 일인가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민영을 새댁이라 부르곤 했다. 정현과 보낸 시간은 그만큼 길었다. 실제로도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적어도 민영은 그렇게 믿어 왔다. 알고 보니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 헤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정현의 집에서 쫓겨난 후, 혼자 사는 작은 자취방으로 돌아갔었다. 두 평 남짓한 방은 숨 막히고 을씨년스러웠다. 정현의 학비에 보태기 위해, 전 재산인 방 두 개짜리 빌라의 전세금을 빼고 이 반지하 원룸으로 이사 온 게 2년 전이었다.

사람을 잘 챙기고 다감한 민영은 원래 친구가 많았다. 친구들은 훤칠하고 예의바른 정현을 처음에는 마음에 들어 했으나, 점차 민영의 헌신이 도가 지나치다고 여겼다. 나중에 사정을 더 자세히 알게 되자 다들 걱정하며 말렸다. 뭘 믿고 그렇게 살신성인하느냐고 입을 모았다. 그래도 민영은 막무가내였다.

로미오와 줄리엣 증후군이라는 증상이 있다. 장애가 커지고 주위의 반대가 심할수록 애정을 이루려는 욕망도 커지는 증상이다. 반발 심리와 인지부조화가 원인이다. 민영이 딱 그랬다.

모두가 정현과의 만남을 반대하자 더 오기가 생겼다. 오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그녀에게는 정현의 말만이 진실이고 진리였다. 급기야 마지막에는 친구들도 진저리를 치며 연락을 끊어버렸다. 친구들의 행동이 정현과 자신의 사이를 질투해서라고 믿은 민영이, 그녀 혹은 그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한바탕 악다구니를 퍼부은 탓이었다.

‘내가 미쳤었나봐.’

갑자기 왜 이런 기억들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좌우간 그 결과, 지금 민영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이였던 정현조차 떠났다.

그녀는 침대 옆, 작은 협탁에 놓인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정현과 민영은 어깨동무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유일하게 같이 찍어서, 민영이 몹시 아끼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노라니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그대로 집에 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았다. 못 참고 다시 뛰쳐나온 게 벌써 몇 시간 전이었다. 그때부터 쭉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버스와 지하철은 막차 운행도 끝난 지 오래였다.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던 자동차들이 모습을 감추고 인적도 뚝 끊겼다. 때맞춰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초겨울의 새벽에 맞는 비는 뼈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마음이 허전해서 더 추웠다.

안 되는 년은 뭘 해도 안 돼. 민영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적으로 뭔가가 그녀를 이끄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그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응?’

골목 안에 발을 들인 순간, 민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강한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지겨운 동네에서 산 지 오 년이 넘었다. 제법 멀리 걸어 나왔다고는 해도,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그녀가 모르는 낯선 골목이 있을 턱이 없었다. 공부하느라 바쁜 정현 때문에 변변히 여행도 하지 못해서, 데이트는 늘 동네 산책으로 대신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 거리의 샛길 하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들어선 이 골목은 너무도 낯설었다.
제법 넓은 골목 안쪽에는 환하게 불이 켜진 가게가 보였다. 주변 모든 집의 불이 꺼진 상태라 더욱 시선을 끌었다. 분위기가 식당 같지는 않았다. PC방이나 당구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 시간까지 문을 연 걸 보면 24시간 편의점일 거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원래 여기에 편의점 없었는데. 새로 생겼나?’

그러고 보니 찬비를 오래 맞아서인지 오슬오슬 추웠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십중팔구 감기에 걸릴 것이다. 이 판국에 까짓 감기 따위 걸리면 어떠냐. 감기가 악화돼서 폐렴이 되고, 그러다 죽어버리면 정현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갖지 않을까? 잠깐 이런 생각도 했지만, 당장 이가 딱딱 맞부딪치는 추위를 감당키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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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은 불이 켜진 가게를 향해 비척비척 걸었다. 가게는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간판 가장자리에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네온사인을 환하게 켰는데, ‘환상 편의점’이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가게 주위에만 희미하게 안개 같은 것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묘한 이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무슨 일레븐이나 뭐뭐 25시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아니라, 누군가 동네에 개인적으로 차린 모양이었다. 이 가게가 새로 생겨서 골목이 더 낯설어 보였는지도 몰랐다.

민영은 편의점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문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깨끗했다. 손님이 들어오자 카운터에 있던 점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듣기 좋은, 부드러운 저음이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민영은 점원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지나치게 빼어난 외모 때문이었다.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깊은 눈매에, 피부는 여자인 민영이 부끄러울 정도로 희고 맑았다. 하얀 피부에 검은 유니폼이 썩 잘 어울렸다. 입술은 얇고 붉었으며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찌 보면 한국인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외국인이나 혼혈 같기도 했다. 특히 시선을 끄는 건, 신비로운 보랏빛이 감도는 눈동자였다.

‘컬러 렌즈라도 낀 걸까?’

민영이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점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손님. 비를 흠뻑 맞으셨네요. 뭐 찾으시는 거라도?”

그는 생김새만큼이나 목소리도 달콤했다.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민영이 더듬더듬 답했다.

“아, 저, 뭐, 뭔가 따뜻한 걸 마시려고…….”

“저쪽으로 가 보세요. 손님이 바라는 상품이 있을 겁니다.”
점원의 말은 약간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내가 바라는 상품? 보통 저런 식으로 말하나?’

민영은 점원이 가리키는 대로, 안쪽의 진열대로 가기 위해 카운터 앞을 지났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는데, 편의점 점원이 잘생겼다고 해서 넋이 나가다니.

정현의 변심이 떠오르자 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했다. 정현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이 편의점 점원에 비하면 요즘 표현으로 오징어였다. 그래도 민영은 그가 그리웠다. 만약 지금 정현과 이 점원이 나란히 서서 동시에 사랑을 고백해온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택할 터였다.

그때, 점원이 민영을 힐끗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속마음을 읽히기라도 한 것처럼 뜨끔했다. 민영은 음료 가판대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눈물이 나오기 전에 대충 뭔가를 사서 가게를 나가고 싶었다.

음료 가판대에는 형형색색의 병이며 캔에 담긴 음료들이 죽 진열되어 있었다. 종류는 다양했지만, 따뜻한 음료가 들어 있을 보온기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민영의 눈이 문득 한 음료수병에 가서 멎었다.

‘사랑의 묘약’이란 이름의 음료였다. 민영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이 그 병을 집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유리병이었다. 연한 분홍색의 음료가 투명한 병 안에서 찰랑였다. 그녀는 병을 자세히 살폈다.

문제의 음료는 다소 특이했다. 우선, 병 표면에 사랑의 묘약이란 이름이 덜렁 적혀 있을 뿐, 성분이나 유통기한 등이 표기된 라벨은 어디에도 붙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제조회사 표시조차 없었다.

‘이거 뭐지? 불량식품도 아니고.’

불량식품이라기에는 병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나치게 세공이 정교해서 병 값만 몇 천 원은 될 듯했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하트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형태였다. 잠시 바라보던 민영은 그게 심장을 묘사한 것임을 깨달았다.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았다.

“아하. 그 물건이 손님을 부르던가요?”

민영은 별안간 귓가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기겁했다. 놀라서 하마터면 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느 틈에 점원이 다가와서 등 뒤에 서 있었다. 그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묘약이 눈에 띄셨다니……. 누군가 나쁜 사람이 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모양이군요?”

점원의 목소리는 은근하게 민영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왼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륵 흘러내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며 울고 또 울었다. 처음 보는 미남 앞에서 창피하게 무슨 꼴이냐 하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점원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가 더 이상 돌아봐주지 않는군요. 그렇죠? 그 사람의 마음을 다시 붙잡고 싶은가요? 그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싶은가요?”

그의 말은 민영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마치 주문과도 같았다. 민영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이 빙그레 웃었다.

“좋습니다. 사랑의 묘약을 고르신 건 탁월한 선택이에요. 그 약을 잘만 쓰면 손님을 울린 남자의 마음을 다시 붙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 어떻게…….”

“원래 그런 약이니까요. 머리가 아플 때는 두통약을 먹고 속이 거북할 때는 소화제를 먹듯이 말입니다. 단, 그 약을 사용하실 때는 유의하실 점이 있어요.”

반드시 명심하라는 듯, 집게손가락을 세워 보인 점원이 말했다.

“일주일에 한 방울. 그 양이면 충분합니다. 한 방울의 약효가 일주일간 지속되거든요. 그렇게 한 달, 그러니까 단 4주일만 지속하신다면, 그 후에는 사랑의 묘약이 없어도 그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겁니다. 아셨죠? 일주일에 한 방울씩 한 달입니다. 용법을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민영은 본능적으로 점원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몽롱하고 멍한 와중에도 말했다.

“저, 이건 얼마예요?”

점원은 어쩐지 비웃음처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까의 묘한 미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민영은 살짝 한기가 들었다.

“후후. 왜 인간들은 뭐든 돈으로 가치를 따지려고 할까?”

“예?”

“아닙니다. 돈은 필요 없어요. 나중에 효과가 좋다고 느껴지셨을 때, 그 효과에서 비롯된 손님의 마음으로 지불하시면 충분합니다. 대가는 제가 알아서 받아가도록 하지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공짜로 준다는 의미였다. 민영은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제가 감사하지요. 환상 편의점의 상품으로 부디 행복을 잡으시길.”

점원의 모습이 갑자기 꺼지듯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큰길가에 나와 있었다.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눈에 들어오는 건 몇 년 째 보아 익숙해진 거리의 풍경뿐이었다.

‘이게 대체…….’

조금 전까지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에는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유리병이 꼭 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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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  
    명지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단행본 <문답 무용>, <파이널 에볼루션> 출간
    <도전!웹 소설 쓰기>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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