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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드]1등 못한 게 죄인가…"뭣이 미안헌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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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리우올림픽 10m 공기권총 결선에서 5위에 머물렀던 진종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죄송합니다."

리우 올림픽 개막 첫날 메달을 따지 못한 진종오(37ㆍkt)가 한국 취재진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1등만 기억하는 올림픽은 그만
리우올림픽의 새로운 트렌드…사과하는 선수,말리는 팬
엘리트스포츠, 금메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잇따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당연하게 느끼는 패자의 자세이기도 하다.

진종오는 남자 사격 10m 권총 결선에서 5위를 기록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같은 종목에서 한국 첫 금메달을 신고했던 그다.

온 국민의 기대가 쏠려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세계 5위의 성적에 죄송하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패자의 사죄, 언제까지

 여자 펜싱 사브르 개인전에서 디펜딩 챔피언에 실패한 김지연(28ㆍ익산시청)도, 여자 유도 -57kg급 16강에서 탈락한 세계 랭킹 2위 김잔디도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경기에 대한 평가도, 프로 스포츠인으로서의 분석도 들을 수 없었다.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팀에 첫 메달리스트인 여자 유도 -48kg급 은메달리스트 정보경(25ㆍ안산시청)마저도 “스타트를 금메달로 끊고 싶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2등은 기억하지 않는 목표
 금메달 기대주들의 패배는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선수단의 가혹한 목표는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0-10’으로 불리는 리우 올림픽 한국 국가대표 선수단의 목표는 ‘금메달 10개 이상 획득, 종합 순위 10위 이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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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숫자 안에는 금메달 중심의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선수의 실력을 ‘금메달 가능성’으로만 평가하고, 종목별로 금메달 개수만 따져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다.

204명의 선수가 모두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더라도 ‘10-10’ 달성에는 실패한 셈이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이같은 1등 중심주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로 활동한 모 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은 모든 선수들의 단 하나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선수권에서 아무리 금메달을 따도 올림픽에 한번 나가는 것만 못하고, 한국은 올림픽에서도 금메달만 알아주는 분위기”라면서 “올림픽 쇼트트랙 은메달리스트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경기력 저해하는 금메달 부담감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장미(24ㆍ우리은행)는 리우 올림픽 여자 사격 25m 권총 본선에서 9위에 그쳐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세계 랭킹 6위인 그로서는 아쉬운 결과다. 그는 “마지막에 긴장이 너무 많이 돼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면서 “그동안 (진)종오 오빠가 항상 1등으로 대회를 시작하니 마음이 편했는데 이번엔 허전했다”고 털어놓았다. 진종오의 첫번째 금메달 조준이 빗나가면서 사격 종목 메달에 대한 부담감이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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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남자 양궁 올림픽 대표 김우진은 `금메달 유력 후보`라는 당초 예상과 달리 개인전 32강에서 탈락했다. [사진 올림픽공동취재단]

이번 올림픽의 남자 양궁 대표 김우진(24ㆍ청주시청) 처럼 양궁 개인전에서 세계 랭킹 1위가 탈락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당시 세계 랭킹 1위 임동현(30ㆍ청주시청)이 개인전 16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복싱 라이트플라이급(49kg) 세계 랭킹 1위였던 신종훈(27ㆍ인천광역시청)이 랭킹 3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리아 선수에게 져 16강을 탈락했다.

#오히려 위로하는 팬들
 위로를 받아야 할 선수들이 사과를 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비난보다는 격려가 쏟아졌다.

진종오의 사과를 보도한 기사에 네티즌들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죄송할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유독 메달 지상주의가 심한 듯하다. 정말 수고 많았다” 등의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팬들은 여전히 승리에 열광하지만 값진 땀을 무시하면서까지 금메달에 연연하지는 않는 추세다.

올림픽 성적 지상주의에 언론의 책임을 묻기도 한다. “언론에서 먼저 ‘아쉬운 은메달’, ‘동메달에 그쳐’라면서 부추기지 않느냐”고 꼬집는 팬들도 있다.

 #멋진 패자로 남을 권리
모든 패배한 선수는 죄인이 아닌 멋진 패자가 될 자격이 있다.

경쟁보다는 참가에 의의를 두는 올림픽 정신을 되새기며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멋진 패자 말이다. 은메달을 따고도 아쉬움에 펑펑 울고, 메달을 따지 못하면 “죄송합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도망쳐야 하는 우리 선수들은 멋진 패자로 남을 기회마저 빼앗기고 있다.

해외 선수들의 당당한 패전 소감에는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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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남자 테니스 단식 1차전에서 탈락한 노바크 조코비치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사진 올림픽 공동취재단]

지난 7일 남자 테니스 세계 랭킹 1위 조코비치(29ㆍ세르비아)는 세계랭킹 100위권 밖의 후안 마르틴 델 포트로(28ㆍ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패해 1차전에서 탈락했다. 조코비치는 4년 전 런던에서도 델 포트로에게 져 동메달을 놓친 바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 커리어 골든슬램(메이저 4개 대회와 올림픽을 모두 우승하는 것)을 노렸던 그는 경기 후 눈물마저 보이며 “내 인생 가장 힘든 패배”라고 말했지만 조국 세르비아에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조코비치는 “델 포트로는 좋은 선수이고 이길 자격이 있다”면서 “그것이 스포츠다. 그는 아주 훌륭한 경기를 했고 나는 그를 축하해줘야 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6일 한국 남자 양궁 대표팀이 단체전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을 때 상대팀 미국 선수들은 활을 내려놓고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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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양궁 남자 대표팀은 결승전 패배 직후 환호하는 한국선수들에게 박수를 친 뒤 `큰절 축하 세레모니`까지 보여줘 관중들의 호응을 받았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런던에서 한국을 꺾고 결승에 올라가 은메달을 차지했던 미국이지만 이번엔 한국에 지며 또한번 2등에 머무르게 됐다.

  두번째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건 브래디 엘리슨(28)은 아쉬움보다는 만족을 표했다. 그는 “런던에서는 최상의 경기를 하지 못하고 금메달을 놓쳤지만, 이번엔 우리의 할 일을 다 하고 은메달을 땄다”며 “우리는 정말 잘 했고 한국팀은 완벽했다”고 평가했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스포츠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는 아마추어 정신이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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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자 수영대표 푸위안후이는 동메달에 그쳤지만 솔직한 리액션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웨이보]

여자 수영 배영 100m에서 중국 최초로 동메달을 획득한 푸위안후이(20)는 경기를 마치고 자신이 메달의 주인공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비록 메달을 못 땄지만…”이라고 말하던 그는 수상 사실을 알게되자 “제가 정말 3등이에요?”라며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그는 “지금까지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내 한계를 넘어섰다는 데 만족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푸위안후이는 준결승 당시 자신의 기록을 전해 듣고 “제가 그렇게 빨랐어요?”라며 놀라 한 차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메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경기를 즐기는 모습은 그녀를 중국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들었다.

#스포츠인의 축제를 즐겨라

베일에 쌓였던 리우 올림픽 성화 점화자는 비운의 마라톤 스타 반델레이 리마(47)였다.

리마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에서 37km 지점까지 선두를 달리다 관중의 습격을 받아 넘어지며 페이스를 놓쳤다.

하지만 그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 동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리마는 미소를 띤 채 결승선을 통과했고, 동료들이 명예 금메달을 선물하려 하자 “내 동메달이 더 마음에 든다”고 거절했다. 리우올림픽위원회는 그의 미소와 스포츠 정신이 올림픽 정신을 상징한다고 봤다.
 팬들이 감동하는 것은 ‘10-10’이 아니다. 진정한 스포츠맨십이 국가의 명예와 어우러지면서 분출되는 열정에 팬들은 감동한다. 태극마크는 자랑이 되어야지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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