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후면 올테니 집 잘보게"|이박사 망명길 지켜본 우석근씨의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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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통령은 새벽1시에 망명을 결심했다-』 지금으로부터 26년전인 1960년5월29일 4·19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망명길에 오르기 위해 그의 사저인 이화장을 떠나 비행기 트랩에 오르기까지 그의 경호원으로 그림자 같이 그를 수행했던 우석근씨(59·건축업)가 최근 오란 침묵을 깨고 이화장에서 당시의 역사적 순간을 생생히 증언했다. <편집자주>
이박사가 이화장에 오신지 한달쯤 됐을 때다. 새벽1시. 경호원들이 교대할 시각이다. 때마침 비상벨이 울렸다. 내가 들어가니까 이박사는 상오 7시에 차를 준비하라고 하신다.
나와서 차를 준비하며 우리는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정동교회 가시는 날도 아니고 다른 스케줄도 없는데 대체 어디를 가신다는 걸까.
우리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당시 시경국장은 이박사가 이화장에서 한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일일이 보고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여서 상의했다.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운전사인 박경감을 데려다가 7시전에 차를 대기시켰다.
이박사는 7시 정각에 나타나셨다. 옷입은 모양도, 단장을 짚은 모습도 예전과 다름없었다.
산책을 좀하시는게 어떠냐고 하니 그동안 많이 했으니 됐다면서『시간이 급하니 김포공항으로 가세』 하신다.
직원들이 모두 이화장 잔디밭에 정열해 있다고 하니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늦어도 한달 후면 돌아올 테니 집 잘 봐주게』 하신다. 또 돌다리를 건너며 『내가 잠깐 떠나야만 국내가 조용해져』하신다.
차를 타고 이화장 문을 딱 여니 이미 신문사 차가 와있었다.
김포가도에 들어서자마자 호외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박사 망명」 호외였다. 김포공항엔 허정내각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등이 나와있었다.
당시 기내에선 세관원들이 들어와 소지품 검사를 했다. 그때 짐이라곤 이박사 옷과 부인옷이 들어있는 트렁크 2개, 샌드위치와 마실 것,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 1대등 모두가방 4개였다.
조종사들이 식사를 하느라고 기내에서 1시간가량 시간이 있었는데 허정수반과 대화하며 한시 1수를 지으신 기억이 난다. 기자들이 몰려와 회견요청을 했으나 이박사는 『내가 아무말 않고 조용히 떠나야한다』고 했으며 부인은『아이러브 코리아』하고 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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