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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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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서른다섯, 한창 젊고 아름다운 한 여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이야기다.
월요일은 엠, 화요일은 튜즈, 수요일은 더블, ..쥬디, ..에프, ..쌈디, 일요일은 썬, 여자는 남자들을 그렇게 부른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한 1이 될까 두려워 여자는 7분의 1로 마음을 나누어 놓았다.  그 정도 지분이라면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변질되고 추해진다는 걸, 온전히 바친 사랑의 결과는 상처투성이라는 걸 어린 시절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자는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랑 따윈 없다고 믿는다.
그런 여자 미주에게 어느 날,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808호. 튜즈가 퀵으로 보내 온 건 호텔 키였다. 바이크헬멧의 청년은 작은 봉투를 내 손에 톡 떨어뜨리곤 묘한 웃음을 웃었다. 니 생각대로 호텔로 가진 않는단다, 얘야. 내 건들거리는 눈빛을 읽었는지 돌아서는 청년의 라이더점퍼가 건들거리며 등에 수놓인 호랑이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튜즈도 알 것이었다. 내가 그것에 반응하지 않으리란 걸.

하지만 튜즈는 집요했다. 장소만 호텔일 뿐 절대 규칙을 깨지는 않겠다고 했다. 규칙을 지키는 일은 내게 중요했지만 어기지만 않는다면 튜즈와 그 일로 계속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었다. 룸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신 건 처음이었다. 서빙 직원들은 공손하고 친절했지만 시선을 부딪지는 않았다.

“거봐, 얼마나 편해. 이러고 있으니까 꼭 부부 같잖아. 아무 짓 안 해도 말야.”

튜즈는 내 옆에 바싹 몸을 붙이고 앉았다. 전면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남산은 아름다웠다. 갓 내려앉은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한 켜씩 어두워지는 창을 내다보며 술을 마셨다. 달콤했다. 취기가 돌아 나도 모르게 침대에 기대고 누웠던 것 같다.

어둠 속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잠들면 안 돼. 내 속에서 누군가 외치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려보니 튜즈의 오른 팔이 내 가슴위에 가로 놓여있었다. 오늘 튜즈는 푸른 잉크 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도 저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안되겠어. 이제 가야겠어.”

팔을 옆으로 옮겨놓으며 일어나려는데 튜즈가 거칠게 내 어깨를 붙들었다.

“왜, 벌써? 반칙이잖아. 아무 짓도 못하게 해놓고….”

술기운 때문에 당장 호텔을 나갈 수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잠결에도 진동하던 그 향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럼 그 셔츠부터 좀 벗어줘.”

“응? 이거?”

튜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단추를 푸는 손의 떨림이 건너왔다.

“긴장하지 마. 셔츠 냄새가 싫어서 그러는 거야.”

푸른 색 셔츠는 빠르게 엷은 어둠 속을 날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튜즈는 화난 사람처럼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튜즈의 몸을 받아 든 매트리스가 요동을 쳤다.

“셔츠에서 이상한 냄새났어?”

매트리스의 요동에 튜즈의 목소리가 함께 울렁거렸다. 튜즈는 팔을 뻗어 매트리스 위의 내 머리를 받쳐주었다. 튜즈의 셔츠에선 늘 섬유린스 향이 났다. 어떤 용기에 담긴 어떤 색의 액체인지 눈 감고도 훤한 익숙한 향이다.

엄마는 매번 세숫대야에 린스를 붓고 아버지 셔츠를 담가 두었다. 그러곤 탈탈 털어 옷걸이에 정성스레 널며 혼잣말을 했다.

‘어느 년 좋으라고 매일 이 짓인지….’

가끔 튜즈에게 안길 때면 빳빳하게 다림질 된 그의 셔츠에서 엄마가 느껴지곤 했다. 불 꺼진 방. 혼자 누워 뜬 눈으로 밤을 새던 엄마. 한숨소리가 새 나올 때면 가슴이 막혔다. 새벽이면 그건 어느새 흐느낌이 되어있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 엄마가 서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내 목을 감싸고 있던 튜즈의 팔을 빼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도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튜즈는 제 몸에 얼굴을 들이대고 흠흠 거렸다.

“섬유린스!”

튜즈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섬유린스…?”

“셔츠 드라이 맡김 안 되나? 우리 오피스텔 사람들은 다들 드라이 맡기던데….”

“잘됐네. 나도 미주 집에 가면 거기 셔츠 벗어놓고 와야겠다. 드라이 맡겨 줄 거지? 그럴 거지, 응?”

튜즈는 다정스럽게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나로도 충분히 내 얼굴을 다 가릴 만큼 큰 손을 가진 튜즈. 구두장이 손이다. 세상의 수많은 발을 위해 희생하는 손. 명품 양복과 넥타이에 걸맞지 않게 투박하고 큰 손을 가진 튜즈는 가끔 내게 그걸 펼쳐 보였다. 튜즈는 명품 구두사업으로 성공한 아버지 일을 물려받아 더 크게 성공시켰다. 하지만 늘 자신을 구두장이라 불렀다.

“난 미주가 어떤 집에 사는지 궁금해. 가보고 싶어.”

크기가 반도 안 되는 내 손이 그의 큰 손을 얼굴에서 떼어낸다.

“아니면…, 우리가 같이 지낼만한 근사한 데를 알아볼까? 말하자면 우리 둘만의 집.”

내겐 둘만의 집이 필요하진 않다. 튜즈처럼 가정이 있는 사람과 나는 집을 가질 이유가 없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튜즈는 내 규칙에 동의했었다. 절대 섹스는 하지 않는다.

그것만 지킨다면 당신이 먼저 관계를 깨지 않는 한 유효해요. 튜즈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깨야할 위기가 생긴다면 모든 건 원위치 돼요. 튜즈는 천천히 고갤 끄덕이며 내 의중을 읽으려는 듯 빤히 내 눈을 바라보았었다.

상황이 달라지면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함께 한 적도 있었지만 규칙을 깨는 일은 아직 없었다. 벌써 1년이다. 튜즈는 벌떡 일어나 내 발 앞으로 오더니 내 무릎을 와락 껴안았다. 자신의 셔츠를 뭉개고 앉은 걸 아는지 모르는 지, 침대에 걸터앉은 내 엉덩이를 두툼한 큰 손으로 감싸 안고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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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미주야.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나는 대답 대신 튜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답해 봐. 미주, 너도 나 사랑하지?”

고개를 들고 튜즈가 내 눈을 깊게 바라본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이다. 비록 일곱 개로 나눈 한 조각의 지분이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더 많이 사랑하거나 집중할 수 없다 해도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었다.

“나, 니 남자 맞지? 미주 남자. 응?”

그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지분이 일곱 조각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늘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 때면 묻고 또 묻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던 여자. 아버지는 오빠나 동생, 혹은 나를 바라볼 때 우리 눈동자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를 제쳐놓은, 그 뒤에 황홀하게 버티고 서있는 여자가 누군지 나는 궁금하고 또한 미웠다.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혹은 둘러앉아 티비를 보다 갑자기, 아버지가 외출 채비를 할 때면 어김없이 나도 발딱 따라 일어났다. 그러곤 옷자락을 잡고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빠, 미주 좋아해? 미주 좋아하지? 응? 대답해줘.”

아버지가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하는 동안 일부러 옷소매에 매달려 다녔다. 혹 내 어리광에 걸려들어 아버지가 다시 거실 소파로 돌아오거나 티비 앞에 앉아주길 바랐다. 애 시켜서 뭐하는 짓이야? 아버지는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는, 바보 같은 엄마는, 아버지 일 보러 나가시는데 못 써! 얼른 내 손을 잡아채고는 자기 옆에 붙들어두었다. 하지만 금방 엄마의 손에선 힘이 풀렸다.

도대체 엄마는 여자를 만나러 나가는 줄 알면서 왜 그걸 모른 척 했던 걸까?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헤어지게 될까 두려워서? 세 아이가 불행해 질까봐?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그저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중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늘 옆에 두고만 싶었을 지도, 죽을 때까지. 결국 그렇게 되었지만. 그래서 다 받아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버려지는 것보단 참고 견디는 걸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아버지의 선택이 아니라 엄마의 선택이었던 거다. 엄마의 불행이라는 것은.

튜즈는 아버지에게 매달리던 나처럼 그 큰 덩치로 내 작은 무릎에 매달려 있었다.
“맞아…, 미주 남자 맞아….”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어졌다. 그래 맞다. 미주 남자. 하지만 미주남자는 당신만이 아니야.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건 당신은 7분의 1의 지분을 가질 뿐이야. 내 손을 뿌리치고 나가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뿌리치고 나가 다른 여자를 품에 안았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용기가 솟구쳤다. 어떤 남자에게도 내 마음을 다 주지 않을 용기. 어떤 남자에게도 내 사랑을 다 퍼 붓지 않을 용기.

우리는 널찍한 호텔 주차장에서 각자의 차로 향했다. 튜즈는 얼른 차를 내 쪽으로 가져와선 예쁘게 박스 포장된 구두 두 켤레를 내밀었다.

“미주는 하이힐을 좋아하니까…. 이건 브라운 플랫폼이고, 이건 핑크색 메리제인 슈즈야. 전문가 구두장이 입장에서 말하자면 미주 발엔 메리제인이 제일 잘 어울려.”

튜즈는 박스를 열어 핑크색 구두를 한 짝 꺼내 보였다. 발을 내밀면 당장 신겨주기라고 할 것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나 구두 많아. 벌써 몇 켤레 째야.”

“내가 만든 것만 신게 할 거야. 미주 구두는 모두 내가 만들 거야.”

“구두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얘기 몰라?”

튜즈가 웃음을 머금고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가지마. 미주가 도망 안가면 되잖아.”

갑자기 할 말이 없었다. 튜즈는 내 눈동자 속 진심을 읽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한참 그렇게 서서 나를 쳐다보더니 생각난 듯 내 차 뒷좌석에 구두상자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곤 커다란 꽃다발을 그 옆에 놓았다.

“발 사이즈 240까지만 키워봐. 그럼 구두가 더 예뻐져. 뭐하느라 아직도 발이 이렇게 작냐.”
튜즈는 구두를 선물할 때마다 내 작은 발을 타박했다.

“옛날 중국에선 여자들 도망 못 가게 전족을 신겨서 그렇다더라만.”

전족을 신어 발이 기형이 된 중국 할머니 사진을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났다.

“가겠다는 사람 억지로 잡아두면 뭐해. 그렇다고 마음이 붙잡아지는 것도 아닌데…. ”

갑자기 튜즈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그래서. 미주도 언젠간 갈 거란 거네? 그래서….”

그래서 섹스 하지 않는 거야? 라고 튜즈의 눈빛이 물었다. 다정함이 가신 눈빛. 이 남자는 아직 나보다 진화가 덜 된 남자다. 섹스하지 않는 이유는 내게 있는 게 아니야. 당신 아내에게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내가 엄마였고 그 엄마의 외로운 밤을 내가 늘 지켜봤으므로, 그래서 불행했으므로, 나는 당신의 모든 걸 다 차지해도 당신의 밤을 가지진 않겠어요, 말하고 싶지만 나는 꾹 참는다.

“아무데도 안 가.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마음 상하지 마, 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언제나 있어 줄 거지? 거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튜즈의 얼굴이 부드러워진다. 우린 잠시 마주보고 웃는다. 내 차는 호텔 지하주차장을 미끄러져 나간다. 룸 미러에 담긴 튜즈가 점점 작아진다. 튜즈는 내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목을 빼고 그렇게 서 있을 것이었다.

고흐가 그린 구두 그림이 왜 여덟 개인지 알아? 8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거든. 성경에 보면 7은 완전함을 말해. 그래서 8은 완전에 덧붙인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 튜즈는 고흐의 구두 그림을 좋아했다. 나는 고흐 그림에 있는 그런 구두를 만들고 싶어. 오래 신어 발에 익숙해진 아주 편한 구두. 그렇지만 겉모양은 아름답고 세련된, 그런 구두를 만드는 게 내 소원이야.
정말 그런 구두를 만들 수 있다면 그건 튜즈에게 엄청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아름답고 세련되고 멋지지만 오랜 시간 발에 맞춰진 듯 편한 구두.

그건 마치 아버지가, 엄마를 처음 만나 가슴 설레던 마음으로 평생을 사랑할 수 있다고 호언하는 것처럼 불가능하게 들렸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 튜즈의 여자로 화요일을 살지만 내일은 수요일, 더블의 여자가 되는 것이다. 내일은 좀 일찍 더블을 만나야한다. 그러려면 아침부터 처리해야할 일들이 많다. 차 속도가 빨라진다. 룸미러에 가득 들어찬 구두박스가 흔들린다. 내가 저 구두를 신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 해도 슬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마, 튜즈. 화요일은 당신만 사랑할게.

<목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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