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잡맹(job盲)의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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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는 문맹(文盲)이란 단어를 거의 잊고 산다.

높은 교육열 덕에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 된 지 오래고, 정부 통계에서 문맹률이 사라진 지도 오래다.

컴맹(com盲)이란 단어는 아직 꽤 많은 사람의 신경을 건드린다. 통계청에 따르면 6세 이상 인구 중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컴맹의 비율은 2002년에 37%였다.

이 정도 컴맹률은 다른 나라와 견주어 나쁘지 않다. 컴퓨터로 최소한 인터넷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할 때, 지난해 한국의 인터넷 이용률은 59.4%로 미국(72%)보다 낮았지만 영국(50%).일본(47%)보다 높았고 캐나다(62%)와 비슷했다.

이처럼 우리는 문맹을 일찍이 '퇴치'하고(당시엔 '퇴치'라 했다) 컴맹에서도 빨리 '탈출'(요즘엔 '탈출'이라 한다)하고 있다.

그러나 문맹.컴맹만 극복하면 눈이 다 떠지는가?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까막눈인 것이 있다. 바로 일자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다.

일자리. job.

미국 사람들은 '좝'이라 읽고 영국 사람들은 '좁'이라 발음하며 우리는 외래어 표기법상 '잡'이라고 쓰는 job. 컴맹처럼 '잡맹'(job盲)이 있다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잡맹'의 사회다.

일상 대화는 물론 경제 기사, 정치인 연설, 정책 토론, 대통령 후보 유세 등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선진국에서는 job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빈도가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일자리, 일자리…. 어떤 때는 그네들의 시작도 일자리요, 끝도 일자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주지사 선거, 상.하원 선거는 '일자리를 얼마나 많이 만드는가'를 빼고는 치를 수가 없다. 문맹자들도 job이라는 소리에는 귀가 번쩍 뜨이고 그에 따라 표가 갈린다. 지난해 현대차 공장을 유치해 간 앨라배마주는 1997년에 이미 벤츠 공장도 유치했다.

당시 주 정부는 벤츠 공장까지 들어가는 하이웨이를 새로 놓아주며 길 이름도 벤츠로 지었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기 위한 주민들의 직업 훈련 비용도 주 정부와 벤츠가 나눠 부담했다. 다 새 일자리 때문이었다.

90년대 초 영국 웨일스 지방에 출장 갔을 때 시종일관 들은 소리도 일자리였다. 탄광 지역을 확 바꿔 일자리 몇백개를 새로 만들었다, 소니의 유럽 지역 본부를 유치해 새 일자리를 확보했다, 한국 기업도 여기 투자하면 노사분규도 없고 좋을 것이다 등등. 투자유치를 위한 모든 설명을 일자리에서 시작해 일자리로 끝맺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과거 고성장 시절의 타성에 젖은 탓인지 우리는 일자리 창출이 얼마나 절실한지 잘 모르고 있다. 정부는 새 일자리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복지.분배 대책임을 꿰뚫지 못하고 코드를 잘못 잡았다.

노동운동은 있는 일자리 끌어안고 사수하는 것이 전부인양 변질됐다. 그건 이기주의지 노동운동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아직도 투자유치라고 하면 '외국 자본이 몰려온다'식으로 받아들인다.

외국 자본이 몰려오기는커녕 우리 자본도 나가는 판이다. 일자리도, 미래도 함께 유출된다. 더구나 고령사회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요즘의 실업 문제는 단순한 호황.불황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무엇으로 먹고 살며 다시 만나랴.

일자리. job. 그 중요성.

영어로는 'Job first, stupid'인데 점잖은 한국어로는 그런 감이 영 잡히지 않는다. 뉘앙스를 살리며 굳이 옮기자면 '일자리다, 밥통들아'인데 말이다.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