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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제주를 가라, 제주에서 배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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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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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인류사를 묵상하면 할수록 훗날 세계를 이끄는 주요 사상과 종교는 대부분 문명과 문명 사이의 변경지역·경계(境界)국가·교량국가·전방국가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을 고리로 세계가 연결되고, 그들을 넘어야 경계 저편으로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피해는 늘 세계에서 가장 컸다. 자신들의 고난을 넘으려는 고투 속에 그들은 마침내 혼융과 통합, 용서와 화해, 평화와 생명을 향한 세계 보편의 대실천과 대사유를 빚어낸다. 변경이 곧 중심인 까닭이다.

올해 제주도는 도 승격 70주년, 특별자치도 실시 10주년을 맞았다. 2년 후에는 한국전쟁을 제외하고는 최대 인명피해를 기록한 제주4·3사건 70주년을 맞는다. 군부정권 시절 제주4·3을 공부하러 처음 찾은 이래 자주 방문하는 제주는 이제 용서·화해·상생의 세계 최고 배움터로 다가온다. 필자는 지금 특별한 행사에 참여하려 제주에 머무르고 있다.

처음 제주를 찾았을 때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도는 한과 가위눌림과 침묵의 삼다도로 변해 있었다. 4·3광풍으로 인한 시체·피·눈물의 삼다 때문이었다. 인간사회에 정말 이런 비극이 있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참상이었다. 제주4·3은 (그리고 한국전쟁은) 세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지는 세계 분단의 과정에서 발생한 경계국가 한국의 대비극이었다. 특히 세계 분단과 한국 분단 과정에서 제주는 중앙에서 가장 먼 이중경계 지역이었다.

공포와 질곡으로 재생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제주는 오늘날 전혀 다른 삼다도로 변모되고 있다. 용서와 화해와 상생(생명)의 삼다도를 말한다. 민주화와 탈냉전 이후 제주의 자기극복 과정은 인간정신의 대비약과 대도약이었다. 용서와 화해, 해원과 상생의 제주는 4·3의 충격 못지않은 인간영혼의 가장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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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으로 인해 마을 이름 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절대비극을 체험했던 하귀리는 2003년 영모원(英慕園) 위령단을 설립해 애국절사 영현비(英顯碑), 호국영령 충의비, 4·3희생자 위령비를 한 곳에 건립했다. 각각 항일인사, 전몰인사, 4·3희생자 영령들을 모신 것이다. 건립의 마음과 과정은 마을의 정체성 회복과 마음화해, 역사통합의 과정 자체였다. 특별히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절대용서의 비문 앞에선 세계 종교와 사상의 근본 가르침인 사랑과 관용, 치유와 회복을 ‘현실에서’ 체험하며 무릎 꿇는다.

영모원은 서로 다른 죽음을 표상하는 명부와 영혼들을 한 곳에 모셔서 마침내 유공과 희생, 가해와 피해를 함께 기리겠다는, 죽음의 대통합을 통한 삶의 대화해의 절정이다. 매년 치르는 합동위령제는 경이적인 하나됨이다. 그 시각 그곳에서 과거의 삶과 죽음, 원한과 적의는 마침내 후대들에 의해 한 영혼이 된다.

지난 2일의 제주4·3희생자 유족회와 제주경우회(警友會)의 화해·상생 공동추모 행사는 놀라움 자체였다. 당일 모든 행사를 두 단체와 동행하며 필자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며 이 장면이 실제 현실임을 확인해야 할 만큼 놀랍고 놀라웠다. 4·3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반목과 갈등이 심했던, 전직 경찰 조직과 희생자 유족 조직은 3년 전 ‘화해·상생 선언’ 이래 매년 충혼묘지와 평화공원을 공동참배·공동헌화·공동분향하고 있다. 우리는 묘지에의 참배와 분향과 헌화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다. 평화공원과 충혼묘지는 이제 애국·용서·화해·상생의 공동 상징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과 해외의 충혼과 위령 시설도 함께 참배한다. 하여 제주경우회는 화해·상생 노력으로 대통령표창을 수상했다.

이중변경 지역이었던 제주의 세계 중심으로의 진입, 즉 전체 제주와 영모원과 유족회-경우회의 용서·화해·상생·평화의 보편 경로는 한국과 세계에 보고·교육되어야 한다. 세계 어디에서도 아직 대비극의 상호 가해와 피해, 진압과 저항, 민과 관이 하나가 된 곳은 거의 없다. 그 점에서 제주인들은 지금 한국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성직자요 철학자이며, 시인이고 교육자들이다.

한국과 세계가 이념 대결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 써 가고 있는 대용서와 화해, 대평화와 상생의 실제 여정으로부터 배워 끝내 제주가 세계 모델과 세계 보편으로 상승되길 소망한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 특히 북한·일본·중국·세계의 지도자들이 제주 정신과 제주 모델을 깊이 배우기를 호소한다.

제주민들과 같은 세계 선각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고 한걸음씩 발전한다. 세계 화해와 평화 정신을 앞서 실천하고 있는 제주민들에게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