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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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필리핀사태는 아직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선 이런 국면을 좌우하는 초동단계에선 물리적인 힘의 우열이 관건인데 그 점이 분명치 않다.
국방상과 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필리핀군부의 반 「마르코스」 거사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아니다. 지난 7일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날로 고조돼 온 필리핀에서의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불안은 벌써부터 어떤 변혁이나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르코스」 체제의 20년에 걸친 장기독재, 관리와 군부의 부패, 경제정책의 실패, 야당지도자 「아키노」의 피살등으로 민심은 이미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필리핀 야당은 물론 국제여론이 이를 승복할 리가 없다. 야당측은 이에 불복, 대대적인 반 「마르코스」보이콧 운동을 선언하면서 저항에 들어갔고 세계 어디에서도「마르코스」의 대통령 취임식에 경축사절을 보내겠다고 하는 나라가 없다.
결국 이와 같은 정치결핍 상황에선 물리적인 힘을 가진 군의 정치관여가 필지의 일이며, 외교부재의 상황 또한 외세를 불러들이기에 알맞다. 「하비브」 미국특사의 출국과 더불어 이번 사태가 일어난 것은 암묵간에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24일 오전 현재「마르코스」군과「엔릴레」 국방상군이 대치상태를 지속할 뿐 정면충돌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없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공산주의 게릴라인 신인민군(NPA)과 대치해 있는 필리핀 정부군이 양분돼 전면내전 상태로 들어가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사태에 빠져들어 갈 것이다. 이런 사태는 「마르코스」측이나 「엔릴레」 진영 어느 쪽에도 불리하며 자유우방에 대해서도 커다란 타격이 될 것이다.
이러한 파국적인 비극은 양쪽 모두 원치 않고 있다는 증거는 뚜렷하다. 「엔릴레」군 쪽에서도 자신들의 이번 행동이 쿠데타가 아니며「마르코스」측과 협상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하고 있고, 「마르코스」대통령도 처형운운하며 엄포를 놓으면서도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필리핀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결정적인 이해가 얽혀있는 미국 또한 이러한 파국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길은 많지 않다. 「마르코스」대통령이 이미 국외로 탈출했다는 소식도 나오고 있다.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도덕적 기반도, 지도력도, 국가 장래를 내다보는 동제력도 갖추지 못한 지도자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제 「마르코스」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필리핀의 책임있는 정치인들이 협상과 화해를 통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는 국가의 운명을 구출하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과연 내릴 수 있는 상황인지 궁금하다.
결국 필리핀사태의 향배는 25만병력 (경찰군 포함) 을 가진 군의 향배와 필리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세의 「보이지 않는 손」의 향배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필리핀이 같은 아시아·태평양권 국가로서 정치·경제·외교면에서 긴밀한 유대관계에 있는 우방으로 존속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 점에서 우리의 관심은 각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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