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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4 - 예수는 악령을 물리쳤나, 아니면 욕망을 물리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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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예수는 종종 악령을 물리친다. 단순히 ‘엑소시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예수의 권능이 악마를 물리쳤다는 해석이다. 그렇게만 읽으면 아쉬움이 남는다. 성서의 파도가 거기서 멈추고 만다. 다시 말해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돼버린다. 그런데 성서 속의 일화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우리의 심장을 겨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우리의 오해와 착각을 겨냥한다. 예수의 악령 퇴치 일화도 그렇다. 단순히 초자연적인 스토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깊은 영성의 우물이 숨어 있다. 거기서 두레박을 길어올리는 게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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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동쪽편에서 바라본 갈릴리 호수. 일부 지역은 출입금지용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다. 호수 건너편이 티베리아스다.

나는 갈릴리 호수의 동쪽으로 갔다. 거기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은 또 달랐다. 호수 건너편으로 숙소가 밀집한 번화가 티베리아스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팔복 교회와 가버나움이 있는 동네가 아스라하게 보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다. 그 사이로 노을이 내렸다. 호수 동편에는 골란 고원이 펼쳐져 있었다. 시리아 영토였다가 중동전쟁 후에 이스라엘 영토가 됐다. 지금도 국경 분쟁 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에 이스라엘의 미사일 기지가 설치돼 있다. 호수와 들판, 그리고 바람. 평균 해발고도 1000m의 구릉지대인 골란 고원은 제주도를 연상케 할만큼 푸르고 아름다웠다.

골란 고원도 성서의 공간적 배경이다. 다름 아닌 ‘마귀들과 돼지 떼’ 일화다. 골란 고원의 끝자락 즈음에 성서 속의 마을 가라사가 있었다. 호수변 도로를 따라가다가 그곳에서 자동차를 세웠다. 고원의 산들은 웅장했다. 단체 여행객들의 짧은 순례 일정에서는 이곳이 종종 제외된다. ‘마귀들과 돼지떼’일화의 전승 외에는 볼거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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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 고원은 해발 1000m의 구릉지대다. 푸른 들판이 이어지는 고원은 풍광도 아름답다.

예수는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가라사로 갔다. 배에서 내리자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에게 왔다. 그 사람은 무덤에서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통상 마을 바깥에 있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을 무덤으로 많이 썼다. 아마도 마귀 들린 사람은 그런 동굴에서 생활하지 않았을까.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마가복음 5장4절) 아무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상태로 지냈다. 그 사람이 너무 사나워 동네 사람들은 그 길로 다닐 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마을의 골칫거리였다.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도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기도’(마가복음 5장5절) 했다. 요즘으로 치면 정신질환자가 아니었을까.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간질병 환자도 ‘마귀 들린 사람’으로 보았다. 저 산의 중턱, 절벽 위 어디쯤이었을까. 그는 예수 일행을 만났다. 예수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에게 말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가복음 5장7절)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귀 들린 사람’이 답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근처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있었다. 예수가 “가라!”고 하자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2000마리쯤 되는 돼지떼가 비탈을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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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벌거벗은 사람 안의 마귀에게 돼지속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다. 세바스찬 부르동의 1653년작 ‘가라사의 마귀’.

실제 그랬다. 성서 속의 가라사 마을로 알려진 이곳은 호수에서 무척 가까웠다. 산비탈만 내려가면 바로 호수였다. 그러니 저 절벽 위쯤이었을까. 돼지들이 ‘우르르’ 호수를 향해 내달린 곳이 말이다. 해가 떨어질 무렵, 나는 산비탈 아래를 걸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궁금했다. ‘마귀 들린 사람과 돼지떼’일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거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단순하게 읽으면 악령을 퇴치하는 ‘엑소시즘’ 일화다. 다만 그뿐일까. 나는 성서를 다시 읽었다. 깊이 읽었다. 이 일화에는 ‘엑소시즘’을 넘어서는 깊은 영성의 울림이 담겨 있다. 나는 누가복음 4장을 다시 펼쳤다. 예수가 악마를 처음 만난 곳은 광야였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악마와 싸웠다. 악마의 이름은 세 가지였다. 빵과 권력, 그리고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악마들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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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화가 모레토 다 브레시아(1498~1554)의 ‘광야의 그리스도’. 예수 주위에 사자와 사슴, 여우, 두루미 등의 동물들이 보인다. 하늘에는 천사도 있고, 땅에는 악마도 있다. 그 모두를 품고서 예수는 자신의 내면과 싸웠다.

예수는 인간을 품은 신이자, 신을 품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 100퍼센트 신이자, 100퍼센트 인간이다. 그러니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희로애락을 예수도 겪었다. 그런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예수도 공유했다. 어릴 적에는 엄마의 젖을 먹다가 토하기도 하고, 걸음마를 걷다가 몇 번이나 넘어지기도 했을 터이다. 사춘기 때는 옆집에 사는 또래의 소녀를 생각하며 가슴이 뛴 적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예수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현자들은 인간으로서 시행착오를 겪던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직접 ‘인간’을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들에게 이치를 전할 수도 없다. 어둠을 지나온 사람이 어둠을 안다. 어둠을 지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둠을 알지 못한다.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빛을 일깨우려면 먼저 어둠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예수는 어떤 악마와 싸웠을까. 그렇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악마다. 그와 싸웠다. 그건 머리에 뿔이 달리고 삼지창을 든 붉은 피부의 악마가 아니다. 내 안의 가장 향긋한 욕망, 가장 달콤한 집착, 가장 끈적끈적한 고집. 그게 바로 악마다. 그것이 ‘신의 속성’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묵상할 때 ‘마귀 들린 사람과 돼지떼’ 일화의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이 비로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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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000m의 구릉지대인 골란고원. 산 아래 바위 뒤편에 ‘GOLAN(골란)’이라고 쓴 팻말이 보인다. 이 일대는 이스라엘의 미사일 기지가 있는 군사지역이기도 하다.

비탈길을 걷다가 나는 작은 바위 위에 앉았다. 아래에 갈릴리 호수가 보였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품고서 눈을 감았다. 그들은 누구일까. 성서에는 그들이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도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기도’(마가복음 5장5절) 했다고 한다. 그리스어 성서에는 ‘En krazon kai katakopton heauton lithois’라고 돼 있다. 영어로는 ‘through all day and night among the tombs and in the mountains he was crying and gashing himself to stones’이다.

먼저 ‘through all day and night’이다. 낮과 밤을 통틀어 그들은 내내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고통의 시간이다. 우리가 고통에 빠질 때도 그렇다. 낮도 어둠이 되고, 밤도 어둠이 된다. 고통은 밤낮으로 계속된다. 그러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울부짖으며(crying), 자신의 몸을 돌에다 내려쳤을까(gashing himself to stones). 어찌 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도 종종 ‘무덤과 산(among the tombs and in the mountains )’속에 갇힌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갇힌다. 그 속에서 소리쳐 울면서 내 몸을 돌에다 내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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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1886~94)의 ‘마귀 들린 두 사람’. 브루클린 박물관 소장. 마귀 들린 두 사람이 벌거벗은 채 예수 일행을 만나고 있다. 멀리 언덕 너머로 돼지떼를 치는 사람도 보인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외부의 누군가가 돌로 내 몸을 때리는 것이라 여긴다. 그게 아니다. 내려치는 이는 나 자신이다. 고통을 자처하는 이는 나 자신이다. 무엇 때문일까. 욕망으로 인한 어둠, 집착으로 인한 착각 때문이다. 그런 ‘악마’로 인해 어둠이 생기고, 그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내려치게 된다. 그런 우리를 보면서 예수는 말한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는 이제 악마에게 명령한다. 왜 그럴까. 예수는 악마의 정체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엇으로 인해 생겨나고, 어떻게 작동하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마귀들과 돼지떼’ 일화는 마가ㆍ마태ㆍ누가복음의 세 복음서에 등장한다. 마태복음에는 마귀 들린 사람이 두 명으로 기록돼 있고, 나머지 두 복음서에서는 한 사람으로 나온다. 예수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물음에 대한 마귀 들린 사람의 답이 놀랍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마가복음 5장9절) 이유도 덧붙였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 성서에서 ‘군대’라는 단어는 ‘legeon’이다. 영어로는 ‘legion’이다. 로마 시대의 군대에서 ‘군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무슨 뜻일까.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떼로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그건 우리들 속에서 살고 있는 욕망의 숫자와 겹친다. 내 안의 욕망, 내 안의 집착, 내 안의 고집. 그 숫자가 어디 한 둘일까. 수십, 수백, 수천으로도 어쩌면 모자라지 않을까. 그걸 세어 보기에 말이다. 그러니 ‘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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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화가 브리튼 리비에르(1840~1920)의 ‘가라사의 기적’. 그림에는 절벽 아래가 곧장 호수로 이어져 있다. 2000년 전에는 갈릴리 호수의 수위가 더 높았을까. 지금은 절벽에서 호수까지는 좀 더 거리가 있다.

아무리 많은 욕망의 군대도 예수의 한 마디에 사라진다. 당시 주위에는 놓아서 기르는 돼지떼가 이천 마리쯤 있었다고 한다. 마귀 들린 사람은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그러자 예수는 “가라!”하고 말했다. 마귀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달려 내려가 호수에 빠져 죽었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한 마디에 왜 마귀들이 물러갔을까. 그건 예수가 바로 ‘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빛이다. 천년에 걸쳐서 쌓인 두터운 어둠이라 해도 초 하나 켜는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게 빛의 힘이다. ‘신이 속성’이 갖고 있는 분해력이다.

이 일화에는 뜻밖의 대목도 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가복음 5장7절) 마귀 들린 사람은 놀랍게도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게 누구의 소리일까. 하느님의 소리일까. 아니면 마귀의 소리일까. 그렇다. 그건 마귀의 소리다.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소리다. 그 욕망은 수시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2000년 전의 성서는 이미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럼 지금은 없을까. 우리 주위에 말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앞세운 욕망의 소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변장한 고집의 소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위장한 착각의 소리. 그런 소리가 없을까. 우리는 행여 그것을 ‘하느님의 소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는 않을까. 예수는 그 모든 소리를 향해서 말했다. “가라!” 영어로는 “go away!”다. “사라져 버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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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들과 돼지떼’ 일화의 배경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산 아래 높다란 절벽도 보인다. 돼지떼들은 저런 비탈을 달려서 내려왔을까.

갈릴리 호수 앞에는 마른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주변에는 푸른 풀들이 보였다. 돼지떼는 저 호수로 달려들어갔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더러운 영들’의 죽음이다. ‘더러운 영들’은 그리스어로 ‘akatharton pneumaton’이다. 영어로는 ‘unclean spirits’이다. 그게 죽으면 어찌 될까. ‘clean spirit’이 된다. 그래서 마귀 들린 사람이 제정신을 차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더러운 마음’은 언제든 ‘깨끗한 마음’이 될 수 있다. ‘unclean spirits’이 ‘clean spirit’이 되듯이 말이다. ‘예수’를 통과하면 된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장8절)

마가복음에는 ‘더러운 영들’이 등장하는 대목이 또 하나 있다. 예수는 갈릴리 일대를 돌면서 가르침을 펼쳤다. 효율적인 가르침을 위해서는 제자들이 미리 가서 예수 일행이 머물 숙소와 설교 대상, 마을의 분위기, 설교 장소 등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낯선 마을로 파견했다. 제자들이 가서 ‘설교 준비’를 꾸려놓으면 예수가 직접 가서 설교를 하는 식이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가복음 6장7절)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떠나간 제자들은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가복음 6장13절)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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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동쪽에서 바라본 갈릴리다. 호수까지 가파른 비탈이 이어져 있다. 정면 멀리 보이는 지역이 가버나움 일대다.

예수뿐만 아니었다. 제자들도 많은 마귀를 쫓아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을까.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다. 거기에 깃든 ‘신의 속성’ 때문이다. ‘많은 마귀를 쫓아내다’는 대목은 그리스어 성서에 ‘daimonia polla exeballon’으로 표현돼 있다. ‘쫓아내다’라는 뜻의 ‘exeballon’에는 ‘비워버리다(evacuate)’의 뜻도 담겨 있다. 내 안의 악마, 내 안의 욕망을 비워서 쫓아버린다는 의미가 된다.

누구에게는 성서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누구에게는 성서가 ‘남의 이야기’가 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성서에 담긴 예수의 메시지는 화살이다. 이런저런 일화를 통해서 예수는 끊임없이 활 시위를 당긴다. 그 화살이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예수가 당기는 활 시위가 열두 제자나 동시대 유대인들을 향한다고 생각하면 성서는 ‘남의 이야기’가 돼버린다. 과녁이 그쪽이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가 당기는 활 시위를 돌려서 내 가슴 앞에서 멈추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은 예수의 과녁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럴 때 예수가 쏘아 대는 화살이 어디에 꽂힐까. 그렇다. 나의 몸, 나의 마음에 꽂힌다. 그럴 때 우리의 내면이 성서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예수의 화살이 ‘타닥! 탁! 타닥!’하며 내 안에 박힐 때 비로소 ‘더러운 영(unclean spirit)’이 죽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워진(evacuated) 곳으로 ‘깨끗한 마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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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에 제작된 이탈리아의 작자 미상의 모자이크화.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돼지떼가 호수에 빠져 있다.

그러니 투덜댈 필요가 없다. 성당에 다닌 지 20년이 됐는데, 교회에 다닌 지 30년이 됐는데 왜 나는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자책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그런 투덜댐이 아니다. 성서에서 겨누고 있는 예수의 화살 앞에 내 가슴을 갖다대면 된다. 나를 겨냥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자처해서 과녁이 되면 된다. 그래서 날아오는 화살의 빗줄기에 두 팔을 벌리면 된다.

거기가 어디일까. 다름 아닌 ‘나의 십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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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기 짝이 없는 갈릴리 호수. 성서에는 2000마리의 돼지떼가 호수로 뛰어들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거기서 ‘욕망의 소멸’이란 성서의 메시지가 읽힌다.

<25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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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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