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앞에서 죽으면 영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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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최철주 특파원】조치훈 기성은 15일 아침 9시 두 다리와 왼쪽 팔에 깁스를 하고 칭칭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동경 제3 기따시나가와(북품천) 경원을 나섰다. 그의 부인(경자)과 형 조상연씨, 그리고 「요꼬야마」(횡산효) 주치의와 「스가하라」 간호원이 뒤를 따랐다.
휠체어를 탄 채 병원 밖을 나서는 조기성은 며칠만에 보는 햇빛으로 눈이 부신 탓인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는 대기중인 자동차에 올라 타면서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깁스한 다리가 자동차 문 입구에 살짝 부닥친 것 같다.
기성전 제1국에 나서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무리하게 몸을 이끌고 나서는 조기성은 『바둑장이가 바둑판 앞에서 죽는 것도 영광이라면 영광이다』(조상연 5단의 말)는 말을 남기고 자동차에 올라탄 것을 보면 역시 그는 비장한 각오로 대국에 나서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타고있는 자동차는 긴급시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비상 구급차다.
조기성은 이날 하네다(우전) 공항에서 기성전을 주최하는 독매신문사의 전용기를 타고 40여분동안 비행, 도야마(부산)공항에 도착했다.
주치의와 간호원은 비행기안에서도 조기성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게 되어있다. 도야마시에서 조기성은 침대차를 타고 다시 30여분간 다까오까(고강)의 아마하라시 하이츠호텔로 향했다. 16일에 있을 제1국 대국장이다. 동경에서 자동차로 간다면 7시간 걸리는 거리다.
「요꼬야마」 주치의는 『나는 조 기성이 이번 대국에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의견이지만 본인이 이에 절대 굽히지 않아요. 조 기성은 양쪽 다리를 다쳐 하반신이 아주 불편하지만 상반신은 바둑 두는데 별 지장이 없어요. 조기성의 정신력과 의지력은 아주 놀랄만한 것입니다.
지금의 체력으로도 제1국은 충분히 견디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고 말했다. 「요꼬야마」 의사와 대국장으로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누었다.
-어떤 경우에 조기성의 대국을 중지시킬 것인가.
『그의 건강상태를 계속 지켜보는 중 정신집중이 잘 안 되는 징조가 보이던가 통증을 호소하면 의사의 직권으로 대국을 중지시킬 수밖에 없다. 이상이 있으면 대국중이라도 조 기성을 곧 동경으로 이송할 계획이다』
-이번 조기성의 장거리 여행과 무리한 대국으로 치료가 장기화 될 것 같지 않은가.
『왼쪽 팔목 뼈가 부러져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가 매우 어렵다. 손목뼈가 빨리 아물어야 지팡이 짚고 걷는 연습을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휠체어 타는 연습은 언제부터 했나?
『지난 11일부터 하루 2시간정도씩 연습했다.』
-조 기성은 병원에서도 바둑을 두었는가.
『대국을 앞둔 탓인지 바둑판에 바둑알 몇 점을 놓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몇 차례 보았다.』
조 기성이 8일 동안 입원해 있었던 제3 기따시나가와 병원 503호 병실입구에는 「후꾸다」(복전규부) 전 수상 등 그의 열렬한 바둑 팬들의 쾌유를 비는 꽃다발이 무수히 놓여 있었다. 14일 하오에 만난 조 기성의 부인 교꼬(경자)씨는 『그분의 체온이 36도 8분으로 약간의 미열이 있지만 정상입니다. 식사도 잘 합니다. 낮에는 초컬리트 빵과 뱀장어 요리를 드셨어요. 틈나는 대로 TV도 자주 보고요.』
조 5단은 조 기성이 대국 중 행여 기력이 쇠할까 자라 피를 한 병 사들고 들어갔다.
조 기성이 손을 저으며 막무가내로 이를 물리치자 조 5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먼저 한 모금을 마셨다.
병상의 조 기성이 자신의 책이름처럼 「목숨을 걸고」 승부의 세계로 뛰어들어 기성전은 더욱 볼만한 싸움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작년 「고바야시」(소림광일) 9단에게 명인 타이틀을 빼앗긴 조 기성은 이번에 다시 휠체어를 탄 채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는 구급차에 누워 공항으로 달리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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