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 제주 결항 대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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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신정 제주공항의 62시간 결항 소동은 불시에 난국을 만난 군중들과 우리 사회 조직의 내면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우선 의외의 사실은 제주공항에 정기 노선을 개설하고 있는 항공회사의 「백지」 대비상태였다. 제주도의 난기상과 한겨울의 폭설 사태를 한 두 번 보아오지 않았을 텐데, 결항 사태가 벌어지자 항공사 측은 『죄송하다』는 아나운스먼트와 승객들의 목 타는 문의에 묵묵부답 내지는 모호한 대응 이외의 대비가 따로 없었다.
필경 책임자의 책임 있는 대책이 전무했던 것 같다. 신정 연휴에 가장 바빠야 할 항공사는 마땅히 여러 가지 경우의 시뮬레이션(모의대책)을 갖고 있었어야 옳다. 가령 어느 지역에 몇 번의 비행기가 결항하면 예약 승객들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여러 경우의 도상 계획을 갖고 있어서, 실제로 그 상황에 따라 대비했다면 제주 공항에서 보여준 항공회사의 속수무책은 면했을 것이다.
그날 옆에서 보기에도 면구스러운 것은 도리어 항공사 직원이 떵떵거리다가 군중들로부터 뭇매를 맞는 광경이었다. 더구나 웃지 못할 일은 책임자라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일시에 은신해 버린 사실이다. 창구 직원들만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결국 결항 이틀째인 4일 심야엔 승객들이 아귀다툼을 하며 제시한 대책안에 항공사가 따라오는, 주객전도의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예약 승객들에게도 있다. 우리 나라 군중은 불시의 사태를 만나면 삽시간에 난중으로 변모한다. 질서며 순리는 제쳐놓고 막무가내로 「내가 먼저」에 거의 광적이 된다.
한때는 항공사가 탑승권에 색연필로 써주는 플라이트 넘버와 좌석 번호까지 날쌔게 위조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나 혼란은 이중, 삼중으로 가중되었다.
「내가 먼저」의 다툼질로 승객들끼리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지르는 광경은 더 말이 아니었다. 순리가 순리로 지켜지기만 하면 모두가 최선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텐데, 결국 그런 난장판으로 누구도 손 쓸 수 없는 형편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만한 패닉에도 약한 사람들이 그보다 더한 경우를 만나면 어떻게 대응할지, 그것이 더 무서운 패닉을 불러들일 것 같았다.
여기에 또 하나 민망스러운 것은 이른바 「요인」들의 동정이다. 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차례도 없이 「최우선」으로 보아란듯이 쏙쏙 빠져나갔다. 지도급 인사들일수록 국민에게 보여주는 모범이 드문 것은 비단 제주공항에서의 일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노골적인 광경은 뭇 사람들의 불쾌감을 자아내고도 남을 만했다. 한쪽에선 괴성의 야유까지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딱한 사람들은 외국인들이었다. 영어 아나운스먼트가 있었지만 이것은 문제 해결용 안내방송이 아니라 사과용이었다. 국내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눈치와 요령이라도 부릴 수 있었지만, 외국인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한국 사회의 속성도 알 턱이 없었다.
당연히 항공사 측은 외국인을 위한 별도의 안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사회의 미성숙은 이런 국면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아마 10년 전, 20년 전에 똑같은 상황을 만났으면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10년 여일 우리 사회의 모럴은 변함이 없다는 말인가.
우리 사회는 이제는 공동선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가 쯤은 자연스럽게 알고 지켜야 할 때도 되었다. 「롱 펠러」의 시한 구절처럼 『쫓기는 짐승』같이 우리는 언제까지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국민 모두의 성숙된 도덕감도 중요하지만 사회 조직의 성숙된 운영도 도외시할 수 없다.
이번 신정의 제주도 결항 소동은 그런 의미에서 성숙 사회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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