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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위대 오발사고와 ‘심리적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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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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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도쿄 특파원

지난 5월 23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육상자위대 훈련장. 어이없는 오발사고가 발생했다. 수송 중대가 적과 교전하는 사태를 상정한 훈련에서 실탄이 발사됐다. 자위대원 9명은 공포탄이라고 여긴 듯 가상의 적인 동료 대원들을 향해 79발을 난사했다. 소총에 실탄이 장착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많은 사상자가 생길 뻔한 훈련은 대원 두 명이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은 직후 중단됐다. 방위성은 물론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상상을 넘어서는’ ‘있을 수 없는’ 사고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 달여의 육상자위대 조사에서 탄약 조달 담당자의 원초적인 실수가 드러났다. 업무에 익숙지 않아 4월 실탄 훈련 때 작성했던 서류를 컴퓨터에서 그대로 복사해 탄약을 신청했다. 공포탄 대신 실탄 번호를 잘못 입력했다. 총알을 지급받은 수송 부대도 배포 전 확인 의무를 게을리했다. 실탄과 공포탄은 뾰족한 윗부분의 모양이 다르지만 걸러내지 못했다. 실탄이 담긴 종이상자를 열어 밑부분만 보고 총알 수를 셌다. 상자에 적힌 탄약 종류를 살피지 않았다. 대원들 역시 망설임 없이 실탄을 장착해 발사했다.

‘도둑 맞으려니 개도 안 짖는다’는 속담이 있다. 평소 시끄럽게 짖던 개조차도 도둑맞을 땐 짖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자조와 한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방범 설비를 제대로 갖추고 단 한 사람이라도 보안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도둑은 막을 수 있었다. 애꿎은 개에 책임을 떠넘기는 건 억지다. 오발사고와 같은 안전사고도 ‘단지 재수가 없었다’는 식으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공항 안전검사에서 ‘무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암묵적 예상이 있는 한 무기 적발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겁도 없이 무기를 밀반입할까’라는 확신이 눈을 가린다. 심리학에선 이를 스코토마(Scotoma), 심리적 맹점(盲點)이라고 부른다. 선입관 때문에 사물이나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다. 고정관념에 의해 전체를 놓치고 부분만 보게 되는 터널 시야를 갖게 된다.

인지 신경과학자인 시모조 신스케(下條信輔) 캘리포니아 공과대 교수는 아사히신문 웹 매거진 ‘WEBRONZA’에서 오발사고의 원인을 심리적 맹점으로 분석했다. 탄약 조달 담당자는 공포탄과 실탄을 구별하려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청 절차에만 얽매인 탓이다. 자위대원들은 무의식 속에 ‘설마 실탄이겠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잘못된 확신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한 채 몇 단계를 거치면서 강화됐다. 현실적인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시모조 교수는 “단적인 사실들이 한번 맹점으로 들어가면 이중, 삼중으로 은폐된다”며 “복잡해서 상상할 수 없는 위험도 과소평가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있을 수 없는 사고는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전사고가 잇따르는 한국에서도 꼭 새겨들어야 할 경고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