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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아무도 영재라 안 해, 스스로 답 구할 때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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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0년이 지났다.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한 18세 소년은 이제 아이 아빠가 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 학생에서 세계적인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가 됐다. 김선욱(28) 얘기다. 12일 만난 김선욱은 “지금부터 10년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안양·고양·서울서 20일까지 독주회
“베토벤의 선물같은 극적인 대작
1시간짜리 디아벨리 변주곡 선봬
관객이 생각하게 하는 연주할 것”

“이젠 아무도 영재라 안 해요. 성숙하단 얘기도 없죠. 이때쯤 많은 연주가들이 불확실성 속에서 살게 됩니다. 처음엔 즐기죠. 비행기 많이 타고 연주 많이 하고. 그런데 그 불확실성이 일상이 되면 연주자는 마모됩니다. 이젠 레슨을 받아도 위험해요.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할 때죠.” 그는 자기 손을 보며 “늙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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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일 네 차례의 리사이틀을 갖는 김선욱은 “지금까지 독주회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규칙적인 일상을 꾸준히 사는 것”이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이끄는 힘이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국 런던에 살고 있는 김선욱의 생활은 지극히 규칙적이다. 결혼이 도움이 됐다는 그는 머물고 쉴 곳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침식사 뒤 차 마시고, 뜰에 있는 오두막 같은 연습실로 ‘출근’한다.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연습한 뒤 점심 먹고 이메일을 체크한다. 오후 3~5시는 연습이나 다른 일을 한다. 아들과 동물원에 갈 때도 있다. 저녁 무렵엔 장을 본다. 이런 일상(routine)의 꾸준한 힘이 지금 김선욱을 견인한다. 연주여행 가면 이게 무너진다. 그래서 2박 3일 이상의 여행은 가급적 피한다.

DG와 악첸투스에서 음반 4장을 발매한 김선욱의 디스코그래피는 나날이 풍성해질 전망이다. 4월에 녹음한 마크 엘더 지휘, 할레 오케스트라와의 브람스 협주곡집(할레)이 발매를 앞두고 있고, 8월에는 악첸투스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 ‘열정’을 녹음한다.

14일 노원문예회관(서울)에 이어 15일 평촌아트홀(안양), 16일 아람음악당(고양), 20일 예술의전당(서울)으로 이어지는 ‘김선욱 리사이틀’은 가장 김선욱다운 프로그램을 내세웠다. 모차르트 환상곡 K397, 슈베르트 소나타 D894,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을 연주한다. 김선욱은 “지금까지 독주회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자연스러워요. 음악이 샘솟는 천재의 작품이죠. 뭔가를 인위적으로 덧붙이면 오염됩니다. 베토벤은 달라요. 완벽을 기했죠. 돋보이게 화음을 덧붙였습니다. ‘디아벨리 변주곡’은 베토벤이 32개 소나타를 완성한 이후 썼어요. 생이 끝나기 전에 자신에게 준 선물 같아요. 극적인 대작입니다. 치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이 있을까 싶어요.”

‘디아벨리 변주곡’은 연주시간이 1시간에 달한다. ‘고전음악의 하드코어’라고 불리는 이유다. 내한 연주자들의 레퍼토리로 연주된 적이 거의 없다. 김선욱은 베토벤의 고향 본에서 이 곡의 자필 악보를 검토했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가 베토벤하우스 상주 음악학자 미하엘 라덴부르거와 연결해줬다. 모든 자료를 열람하고 상담할 수 있는 권한이 김선욱에게 생겼다.

“진짜 200년 전 베토벤 글씨였어요. 얼마나 감격적이던지. 영혼이 깃든 것 같았죠. 작곡가들은 곡을 쓸 때 호흡을 만듭니다. 자필원고에서 마디의 간격과 음표 수를 검토하면 곡의 원래 템포를 유추하는 게 가능해요.”

그에게 연주자의 입장에서 잘 된 연주란 무엇인지 물었다. “곡과 자신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죠. 빈 틈 없이 연주시간을 제가 조절할 수 있고, 원하는 소리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지치지도 않고요. 청중의 평가와는 무관합니다.”

음악회가 미술관 관람과 닮았다는 얘기도 했다. “미술관에 작품을 보러 갈 때 여러 동기가 있잖아요. 지칠 때 위안을 구한다든지 작가가 마음에 든다든지. 음악회도 마찬가지죠. 온전히 작품이 주가 돼야 합니다. 그 작품을 저만의 해석으로 필터링해서 전달하는 거고요. 청중도 연주자의 ‘쇼’를 보러 오는 건 지양해야 합니다. 전 관객이 편한 연주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연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치유되길 바랍니다. 사실 그게 제가 연주하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김선욱은 드뷔시, 야나체크, 리스트, 메시앙 등에 빠져 있다고 했다. 이젠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란 수식어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마도 다가올 2020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에 가장 바빠질 사람 중 하나가 김선욱 아닐까.

글=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객원기자 mozart@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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