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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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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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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중국 산업은 한국에서 탈출하고 있다.” 최근 한 중국인 기업가에게서 들은 말이다. 10년 지기인 그는 한국 산업 예찬론자였다. 그랬던 그가 요즘은 “한국의 중국에 대한 상황 인식이 한심하다”며 비판도 한다. “중국 저성장 때문에 한국 수출이 어려워졌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과거 시장이 100일 때 17% 성장하면 17만큼 늘지만, 1000일 때 7% 성장하면 70이 늘어난다.” 중국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다는 거다. 한 중국 전문가는 “요즘 중국 기업인들을 보면 야성적 충동이 느껴진다”고 했다. 기업가 정신이 충만하다는 거다. 분명 중국 기업은 달라지고 있다.

지난주 중국의 알리바바와 상하이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인터넷과 연결된 자동차인 커넥티드카 상용화를 발표했다. 커넥티드카는 세계 자동차와 정보통신 업체들이 미래 먹거리로 달려드는 분야다. 선진 업체들은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킹으로 자동차 운행체계를 교란시켜 나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등의 여러 난제 때문에 상용화를 주저한다. 한데 중국 기업은 이런 난제를 떠나 일단 화끈하게 물건부터 내놓았다.

이번 발표에서 눈길이 간 대목은 차가 아니라 이 차에 탑재된 알리바바 자체 인터넷 운영체계(OS)인 ‘윈(YUN)OS’였다. 2011년 개발된 윈OS는 이미 1000여 개 협력업체를 확보하고, 중국 내 각종 스마트 하드웨어와 가전 등에 탑재되고 있는 사물인터넷(IoT)용 OS다. PC 시대 OS는 마이크로소프트(윈도), 모바일 시대는 애플(iOS)과 구글(안드로이드)이 시장을 장악했다. 이제 곧 도래할 사물인터넷 시대를 앞두고 알리바바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미래형 자동차에 탑재하는 극적인 방식으로 자체 OS를 세계에 알렸다.

최근 중국 전기차 업체인 BYD가 한·중·일 기자들을 초청해 시승회를 열었다는 보도를 봤다. 한·일 기자들은 생각보다 잘 달려 놀랐다고 평했다. 우리가 전기차 투자에 머뭇거리는 사이 전기차 생산·판매에서 중국은 세계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연간 판매 20여만 대 규모. 한국은 3000대 정도다. 그래도 어쨌든 과거의 산업공식을 대입하면, 중국에서 전기차가 잘 나가면 우리나라 연관산업도 잘 돼야 한다. 예를 들어 전기차의 생명인 배터리 부문의 세계적 기업 LG화학과 삼성SDI가 수혜를 보는 방식이다. 한데 최근 두 회사는 중국의 모범규준 인증에서 탈락했다. 대신 중국은 배터리 산업에 20조원을 투자한다. 다 알아서 하겠다는 거다. 이젠 떡고물이 없다.

한국 기업이 중국 시장에서 고전하는 건 저성장보다 이렇게 중국 기업의 ‘게임의 방식’이 달라져서다. 그 배경엔 후진타오 이래 ‘경제적으론 무엇이든 상상하고 실현하라는 석방(釋放)정신’으로 기업가 정신이 고취된 측면이 있다. 야성이 충만한 중국 기업가들은 아예 사물인터넷OS, 친환경차처럼 미래형 산업에 한발 앞서 도전장을 던진다. 우리도 과거 일본이 평면 브라운관 등에 매달려 있는 사이 평판TV로 앞질러 시장을 석권한 것처럼 앞선 도전은 성공확률이 높다.

우리가 중국에 지고 있는 건 ‘기업가 정신’이라는 걸 이젠 인정해야 한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한국 기업가정신지수는 1976년 150.9에서 2013년 66.6으로 뚝 떨어졌다. 재벌의 3·4세 경영이 시작되며 지나친 조심과 안전 위주 경영에 몰입하면서 야성이 사라진 게 원인으로 분석된다.

기업들은 사드(THAAD) 배치로 인한 중국의 경제 보복으로 우리 기업이 어려워질 수 있다며 우는 소리를 한다. 미국은 민주·공화당 양당 정강에 보호무역주의를 못박는 안을 마련했다. 한국 경제에 여러 가지 난제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한데 진짜 가슴 답답한 건 대외적 환경보다 야성을 잃고 핑계만 찾는 초라한 기업가 정신이다. 과거 우리 기업에도 충만했던 야성을 되살리는 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까.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데….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