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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디지털 문맹의 설움을 아느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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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서울 중구청의 ‘스마트폰기초 교육’ 강좌에서 최고령 수강생인 85세 박왕현 할아버지가 강사로부터 네이버 지도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그는 명동 교육장까지 매일 나와서 수업을 듣는다. 그는 “컴퓨터는 간신히 독수리타법을 면했다. 스마트폰은 집에서 잘 안 하게 되니까 이렇게 나와서 배워야 한다”며 열의를 보였다. 한애란 기자

공인인증서? 그건 안 해. 보이스피싱 당할까봐 무서워서. 힘들어도 은행에 가서 직접 일 봐야지”

지난달 22일 서울 명동주민센터에서 만난 임기석(63) 씨는 인터넷 뱅킹에 대해 묻자 손사래를 쳤다. 그는 이곳에 서울 중구청이 무료로 여는 ‘스마트폰기초 교육’을 받으러 왔다. 그는 “이거 배워도 인터넷뱅킹은 할 생각 없다. 스마트폰 배워서 미국에 있는 아들들과 카카오톡을 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했다.

쇼핑과 은행거래는 물론 보험가입과 각종 예약까지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다 되는 디지털 세상. 오프라인과 비교해 거의 모든 거래가 편리하고 빠르고 저렴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디지털문맹자에겐 남의 나라 이야기다. 그리고 디지털문맹자 중 상당수는 고령층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의 2015년 통계에 따르면 50대 이상 장노년층은 정보화 수준이 전체 국민 평균을 100으로 놓았을 때 77.4%에 그쳤다. 장애인(86.2%)이나 저소득층(87.7%)보다 더 낮은 수치다. 정보화기기 접근성면에서는 장노년층도 전체 평균의 95.1%에 달했다. 하지만 역량수준(66.1%)과 활용수준(64.1%)은 크게 뒤떨어졌다.

중구청의 스마트폰기초 교육에 참석한 이정희(70)씨는 최신형 스마트폰을 갖고 있었다. 이전엔 폴더폰을 썼는데 얼마 전 자녀들이 신형 단말기를 선물해줬다. “운전하다 길이 막힐 때 어디로 가면 빠른지, 그걸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볼 수 있으면 참 편리하겠다”는 생각에 교육을 신청했다고 한다. 자동차보험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가입하면 저렴하다고 설명하자 그는 멋쩍게 웃었다. “나도 얘기는 들었어. (온라인보험이) 훨씬 싸다고는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할 줄 모르니까. 그냥 설계사한테 비싸게 주고 하는 수밖에.”

자동차보험은 온라인으로 가입하면 같은 상품도 16~17% 저렴하다. 설계사에 주는 모집 수수료와 사무실 운영비용 등이 빠져서다. 하지만 한 대형 손보사 통계에 따르면 온라인다이렉트자동차보험 가입자 중 60대 이상 비중은 7% 대에 그친다.

은행거래도 마찬가지다. 각 은행은 창구에서 대면거래를 하면 인터넷이나 자동화기기(ATM)보다 몇배 비싼 수수료를 매긴다. 예컨대 다른 은행 계좌로 100만원을 송금할 때 창구를 이용하면 2000원을 수수료로 내야 한다. ATM을 이용하면 700~1200원, 모바일이나 인터넷뱅킹은 500원으로 그 비용이 줄어든다. 아예 모바일·인터넷뱅킹을 통한 이체는 수수료가 없는 은행도 있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뱅킹 이용 고객 중 60대 이상의 비중은 8.5%, 모바일뱅킹 이용 고객 중엔 5.7%에 그친다. 주민등록 기준으로 전체 인구 중 19.1%, 만 20세 이상 성인 중엔 23.8%가 60세 이상임을 감안하면 낮은 수치다. 게다가 갈수록 은행이 비용 절감을 위해 점포와 ATM 수를 줄여가고 있다. 디지털뱅킹을 이용하지 못하는 고령자는 더 멀리 찾아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할 뿐 아니라 더 비싼 수수료까지 부담해야 한다.

디지털문맹자의 소외는 금융의 문제만은 아니다. 경기도에 사는 장모(71·여)씨는 최근 들어 교회 갈 때 택시를 타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예전엔 전화로 부르면 집까지 10분 안에 왔던 콜택시가 요즘엔 30분 넘게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다. 지난달 결국 큰 길까지 나가서 택시를 잡은 그에게 택시기사가 “이제 기사들이 다 카카오택시를 이용하니까 그걸 써야 한다”고 가르쳐줬다.

지난해 3월 서비스를 시작한 카카오택시의 택시기사 회원 수는 5월 기준으로 23만명에 달한다. 전국 택시기사(28만명) 중 80% 넘게 이용한다. 카카오택시, 우버택시, T맵 택시 등 콜택시 앱을 사용하면 콜비도 들지 않는다. 고객들이 이쪽으로 빠르게 넘어가면서 기존 콜택시 업체 중엔 문 닫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명절 기차표 예매 쉽고 빠른 온라인이 대세가 된 서비스도 창구를 이용해야 하는 디지털문맹자에겐 전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고 디지털로의 전환을 늦추거나 이원화된 시스템을 유지하라고 기업에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40~50대가 노인이 되면 이런 문제가 사라진다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기술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고령층의 정보격차는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스마트폰 보급률을 높이고 교육 기회를 늘리는 건 필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장노년층 5명 중 3명은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전 국민 평균은 82%). 각 구청별로 무료 교육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고령층이 스스로 디지털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배우도록 인식을 바꾸는 게 핵심이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다. 김봉섭 한국정보화진흥원 디지털격차해소팀장은 “노인층이 스마트폰이 있어도 배울 생각을 않는 건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며 “기업이 역발상을 가지고 60세 이상 고령층 관련 모바일 서비스를 내놓아 이들의 관심을 끈다면 폭발적으로 이용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고령층에게 ‘나도 해봐야겠다’라는 생각만 심어줄 수 있다면 이들이 모바일 시장의 떠오르는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고령층이 기업에 매력적인 소비계층이 아니더라도 장애인 접근권 문제처럼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장애인 단체는 적극적으로 요구로 소프트웨어에 장애인의 편의를 반영토록 해왔지만 그동안 노인층은 이러한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최재성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령층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도록 용기와 자극을 줘야 한다”며 “정보화사회엔 그것이 바로 노인의 기본권 존중”이라고 강조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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