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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감옥 찾은 대학생 “이기적인 나를 돌아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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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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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룽징시 명동촌에 있는 시인 윤동주의 생가를 찾은 한국 대학생들.

지난 1일 중국 랴오둥(遼東) 반도 최남단 뤼순(旅順)법원 2층 고등법원 법정. 106년 전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곳이다. 현장을 방문한 대학생 40명이 깊은 감회에 젖었다. 독립기념관 주최로 5박6일간 진행된 ‘2016 대학생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6월 27일~7월 2일)를 매조지하는 자리였다. 이날 오전 학생들은 뤼순감옥소도 방문했다. 안 의사를 비롯한 숱한 애국지사가 순국한 장소다.

대학생 40명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봉오동·청산리 전적지, 일송정 등
역사현장 순례하며 통일한국 염원

학생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비장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곳곳에 역사의 분노가 맺혀 있었다. 제가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소름 돋는 순간이 많았다. 지금까지의 이기적인 나를 돌아봤다” “안 의사 앞에서 묵념할 때 눈물이 났다. 내가 그때 태어났다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등 반성과 다짐의 연속이었다.

답사진은 역사학과·역사교육학 전공자, 교대생으로 구성됐다. 다롄(大連) 외국어대 김월배 교수가 학생들을 맞았다. 안 의사 유해 찾기에 11년째 전념해온 그는 “황교안 총리와 중국 랴오닝(遼寧)성 당서기가 어제(6월 30일) 선양(瀋陽)에서 만나 안 의사 유해발굴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며 “여러분의 관심과 열정이 독립운동사를 다시 생각하고, 미래 통일한국을 준비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찾은 독립유적지는 100년 전 과거가 아닌 바로 오늘을 가리키는 나침반 같았다. 답사는 옌지(延吉)시 봉오동 전적지에서 시작됐다. 1920년 6월 홍범도(1868~1943)·최진동(1883~1941)·안무(1883~1924) 등이 중심이 돼 일본군을 격퇴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이 일본에 거둔 최초의 승리로 평가된다. 독립군은 봉오동 일대 깊은 골짜기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전적지는 저수지 건설로 현재 수몰이 된 상태다. 댐 너머 굽이굽이 산골이 우리를 부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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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봉오동전투기념비.

봉오동 전투는 넉 달 뒤 옌지 남서쪽 화룽(和龍)시에서 김좌진(1889~1929)·홍범도 연합부대가 일본군에 결정적 타격을 준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졌다. 청산리 또한 백두산으로 가는 깊고 험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독립기념관 유필규 연구위원은 “모든 게 부족했던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필사의 의지와 리더들의 뛰어난 통솔력 덕분이었다”고 설명했다.

답사진은 역사의 명암을 두루 순례했다. 시인 윤동주(1917~45)·영화감독 나운규(1902~37) 등을 배출하며 민족교육의 요람이 됐던 룽징(龍井) 명동촌, 가곡 ‘선구자’의 고향이자 독립군 중심지였던 일송정, 3·1운동의 독립열기를 간도(間島)에서 이어받은 3·13 반일(反日)의사릉, 국권회복에 앞장선 이상설(1870~1917) 기념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대종교 3종사 묘역, 일제의 수탈과 만행을 증언하는 간도일본총영사관과 다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등을 찾았다. 두만강 하류 첫 도시 투먼(圖們)과 고구려의 영화를 간직한 압록강 중류 지안(集安)에선 바로 강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며 분단의 아픔을 되새겼다.

안중근부터 홍범도까지, 독립투사들은 지금 무슨 말을 건네고 있을까. 서원대 역사교육과 4년 최승희양은 “선조들의 독립의지를 우리 세대가 남북통일이라는 대업으로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대 사학과 4년 양인선양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 ‘인내(忍耐)’ 두 글자만 품어도 어떤 난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뤼순=글·사진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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