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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한국 재벌의 진짜 위기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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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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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삼성 이병철 회장은 신년 대담에서 “새해 소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돈이 없어요. 올해는 돈 좀 벌었으면 합니다.” 한국 최고 부자의 우스개 속에 기업가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스티브 잡스의 ‘Stay hu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고 언제나 우직하게)’와 맞닿아 있다. 이 회장은 고희를 넘긴 73세에 모든 것을 걸고 반도체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듬해(1984년) 신년 대담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재미가 나고 아주 적극적으로 열의를 쏟는다. 뭘 창조한다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거북선 지폐의 마법(?)으로 현대중공업을 세운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다음 또 하나의 신화가 숨겨져 있다. 그는 그리스의 리바노스로부터 26만t급 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했지만 계약 조건이 형편없었다. 국제 시세보다 훨씬 싼값에 “하자가 생기면 선박 인수를 거절할 수 있다”는 노예계약이었다. 첫 유조선은 무사히 팔려 나갔다. 두 번째 유조선을 만든 73년, 오일쇼크로 리바노스가 인수를 거절해 버렸다. 여기에 유조선 2척을 발주한 홍콩의 선주 CY퉁마저 부도를 맞았다. 울산 앞바다에 대형 유조선 3척이 주인을 잃고 떠 있었다.

현대그룹이 휘청댈 위기에서 정 회장은 역발상을 했다. ‘저 배로 새로운 장사를 해보자.’ 그렇게 세웠던 게 현대상선의 모체가 됐다. 하지만 원유 수송을 독점해 온 석유 메이저 걸프가 문제였다. 정 회장은 당시 과도한 과실송금(본사에 보내는 이익배당금)과 한국 정치권에 뿌린 400만 달러의 뇌물을 문제 삼아 걸프와 정면 대결을 펼쳤다. 결국 걸프는 원유 수송의 절반을 현대에 양보하며 두 손을 들었다.

한국은행이 지난 5월 경상수지 흑자가 103억 달러로 51개월째 흑자 행진이라고 발표했다. 모두 기쁜 뉴스로 여겼겠지만 필자는 소름이 돋았다. 일본과 너무 닮아 가기 때문이다. 일본은 80년 이후 30년 넘게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특히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95년 직전에 경상수지 흑자는 절정에 달했고 1인당 소득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저성장 속의 고령화가 낳은 마법이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50대 고임금 근로자 비중 증가→민간소비 정체→설비투자 감소의 악순환이 시작되면서 빚어진 이색 현상이었다. 1인당 소득이 상대적으로 급증하고, 불황형 경상수지 흑자가 급팽창한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한국도 이미 ‘잃어버린 4년’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기업의 매출증가율은 2012년부터 세계 평균을 밑돌기 시작했다. 설비투자 지표인 고정자산증가율도 2012년을 기점으로 세계 평균보다 낮아졌다. 우리의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2012년 시작된 것도 희한하다. 여기에다 한국의 생산가능인구도 일본보다 딱 21년 뒤인 올해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향해 손가락질해 왔다. 하지만 솔직히 한국이 일본만 닮았으면 좋겠다. 일본은 그나마 60년대부터 30년간 쌓아 놓은 두툼한 피하지방 덕분에 잃어버린 20년을 견뎠다. 또 유니클로·소프트뱅크 등 세계 일류의 벤처도 키워냈다. 아직 한국 경제의 피하지방은 얇고, 대기업을 대체할 벤처도 인터넷 게임과 바이오 분야에 몰려 있다. 여기에 1조원 이상의 자산가 중 자수성가형이 80%에 달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반면 한국은 상속형 부자가 74%나 된다.

한국 경제에 가계 부채 등 뇌관이 적지 않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성장 엔진인 기업의 활력이 떨어진 것이다. 재벌 기업의 위기도 탈세나 배임·횡령에 있지 않다. 오히려 기업가 정신의 실종이 훨씬 근본적인 문제다. 우리 사회가 재벌 2~3세들이 손쉬운 유통·소비재 수입에 눈독을 들인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젊은이들의 직업 선호 1위가 공무원, 2위가 교사인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도전과 기업가 정신의 실종은 대기업을 넘어 온 사회의 문제다. 과연 한국은 몇 년을 더 잃어버려야 할까. 오늘 따라 이병철·정주영 회장 등 옛 거목들이 더욱 그립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