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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안철수의 ‘정의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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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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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정의 앞에는 좌파와 우파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곧잘 말한다. 정의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그에게 정의는 정파를 떠난 불가역적 시대정신인 셈이다.

안철수가 최근 리베이트 의혹 사건으로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배경을 해석하기 위해선 정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물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선제적 포석을 통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검찰 수사 도중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현실 도피이며 또 다른 ‘철수(撤收) 정치’”라는 비판적 시각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계산보다는 명분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차기 대선의 유력한 잠재적 후보 중 한 명인 안철수에게 정의는 무엇이고, 그가 정치를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안철수의 정의론은 그의 인생 여정과도 맞닿아 있다.

일반인의 예상과 달리 그는 자신이 ‘소수파(마이너리티)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의사로 시작해 벤처기업가-대학교수-정치인을 거치면서 단 한번도 ‘주류(主流)’였던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환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이 없는 기초의학을 전공한 그는 임상의학에 비해 상대적 소수파였고, 벤처기업을 할 때는 KAIST나 서울대 공대 출신에게 치였다는 것이다. 대학교수로 있을 때나 정치에 입문할 때도 그는 결코 주도세력으로 평가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서울시장과 대통령 선거 때 멈칫거렸던 것도 이 같은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안철수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론의 중심에 ‘결핍의 역설적 가치’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는 당 대표 사퇴 뒤 지인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건강의 가치는 병에 걸려본 사람이 알고, 배고픈 사람이 밥의 소중함을 알고, 전쟁 중인 나라가 평화의 가치를 더 잘 아는 것이 세상의 역설”이라고 말했다. “일제 때는 독립이 간절했고, 독재 시대에는 민주화가 국민의 염원이었다면 지금의 시대정신은 정의라고 생각한다.”

주류들의 일상적인 관행은 소수자의 입장에선 ‘그들만의 리그’로 비춰진 것이다. “소득의 양극화, 법조계의 전관예우, 국회의원의 특권,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특혜, 기득권, 이런 것에 대한 분노가 정의와 공정, 공생, 공감 등을 불러냈다.”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안철수가 정치를 하는 목적은 이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정의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달라는 목소리가 부족한 나를 정치로 불러냈다. 정치를 배우지 말고, 정치를 바꾸어 달라는 의미에서 불러낸 것으로 이해한다.” 그가 최근 공정사회와 경제정의, 청년실업 해소 등에 천착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정치는 이념 대립의 역사 때문에 지나치게 신념 윤리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이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증오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어 상대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고 자신의 편에게는 관대한 기준을 들이댄다.” 리베이트 사건은 정의를 향한 또 하나의 ‘성장통’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정치시스템으로 평가받는 것은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위임된 권한을 통해 일을 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 정치인의 자세”라고 했다.

안철수에게 정의는 관념적 집착을 넘어 정치인으로서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의 정의론은 향후 개인적인 정치 행보는 물론 정치판 전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거칠어져만 가는 정치세계에서 ‘안철수의 생각’은 긍정적인 변화의 힘으로 작용할까, 아니면 또 다른 철수 정치로 이어질까. 안철수의 정의론은 이제 시작됐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