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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추적] 死後 110년 명성황후 진짜 사진 가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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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이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쟁과 관련, 새 사진 3장을 입수해 공개한다.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의 칼을 맞고 비명에 간 지 110년이 된 시점을 기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 이탈리아 외교관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에 실린 사진. 필자는 설명에서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이라고 썼다.<사진 2>

▶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뒤 몽>(1904)의 명성황후 사진. 자료를 제공한 아장 박사는 설명에 “일본의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의 황후”라고 달았다. 같은 사진을 놓고 명성황후라고 쓴 것과 귀부인·최고상궁·나인·궁녀 등 으로 된 것으로 엇갈려 가장 격렬한 논란을 빚었다. <사진 3>

이번 사진은 그간 허술하게 진행돼 온 명성황후의 사진 논란에 새 국면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명성황후의 사진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 공개된 사진 중 진짜 얼굴이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어느 것일까?

1895년 10월8일 새벽 일본인 자객의 칼을 맞고 비명에 간 명성황후(본명 민자영 또는 아영·1851~95)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는 대개 다 규명됐지만, 여전히 사진 또는 초상을 놓고 ‘맞다/아니다’에 이어 ‘있다/없다’의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명성황후 사진의 진본 확인 작업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지는 것일까?

<월간중앙> 특별취재팀은 명성황후 사진 논쟁에 획을 그을 3장의 중요한 사진을 발굴했다. 취재팀은 최근 희귀본인 테리 버네트의 <코리아:시간의 굴레에 갇힌…(korea : caught in time)>(1900)과 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의 저서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라는 책자를 입수해 ‘명성황후’라고 명기된 사진을 확인했다. 이어 <조선일보> 1935년 1월1일자 신년 특집호‘규중에 숨은 고은 각씨들’ 제하의 기사에 실린 사진을 재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새로 발굴한 3장의 사진은 이미 공개돼 논란을 빚은 사진들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다만 약간씩 사진의 양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논쟁의 흐름을 새롭게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새 사진을 찾아낸 서지학자 김종욱 씨는 “지금까지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쟁이 얼마나 겉핥기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면서 “지금부터가 기존 사진의 재조명과 확인 작업의 시작”이라고 말할 정도다.

- 같은 주인공이 다른 배경으로 등장한 이유

우선 1900년 발간 <코리아:시간의 굴레에 갇힌>에 실린 것. ‘사진가 미상’으로 표기된 이 사진은 “1895년 조선의 여왕은 일본인에 의해 정치적 음모로 암살됐다. 이 충격적 사진은 그녀를 담은 유일 사진이다. 그러나 19세기 당시 조선을 다뤘던 2~3명의 영국인 저작물은 단지 나인(궁녀)일 뿐이라고 확인한 바 있다”는 설명을 달고 있다.

사실 그러하다. 이 사진은 이미 공개된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속의 것(사진 2)과 같은 것이다. 사진설명에는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이라고 달려 있다. 명성황후 승하 직후부터 사진의 진위 논란에 휩쓸렸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만 <코리아>의 사진의 가로 배율이 <꼬레아 꼬레아니> 것보다 약간 큰 것으로 보인다.

사진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고종의 서재)라고 추정한 바 있다. 같은 어여머리라도 비녀를 2개 꽂은 모양은 황후만이 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다만 배경에 다른 옷가지들이 흐트러진 채 걸쳐 있는데다 사진의 주인공이 버선발을 벌린 채 드러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명성황후로 단정하기 곤란하다는 논란에 휩쓸렸다.

2001년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뒤 몽드>(1904)의 명성황후 사진(사진 3)이 공개되면서 논쟁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사진은 개화기 조선을 다녀간 아장 박사가 제공한 것인데, 관심의 초점은 역시 사진설명에 쏠렸다. ‘한국여행’이라는 제목의 글에 붙은 사진설명이 ‘일본의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의 황후’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같고 배경만 다른 사진이 등장한 것은 일대 충격이었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아장 박사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현장을 답사하는 등 사건 규명에 열의를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설명이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궁녀로 둔갑시키기 위해 경복궁 집옥재로 추정되는 사진의 배경을 없애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해석했다.

문제는 <르 뚜르 뒤 몽드>와 같은 사진을 놓고 각기 다른 설명이 붙은 자료가 거푸 나왔다는 점이다.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1906-‘정장한 궁녀’)와 언더우드 여사의 <조선생활기>(1905-‘정장한 귀부인’)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2004년 중국의 산둥화보출판사가 펴낸 <당신이 보지 못한 사진>이라는 책은 같은 사진에 ‘명성황후’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이 사진은 특히 1900년대 초 프랑스에서 발행된 알레베크(당시 한국에 머물렀던 프랑스어 교사)의 엽서 세트 안에 포함되고, 초콜릿·비누·화장품 등을 팔면서 끼워 주는 조그마한 사진 형태의 상품 카드로도 서구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됐다. 미술사학자 이돈수 씨는 “뮈텔 등 프랑스 선교사들이 자국에 조선의 현황을 보고할 때 쉽게 동봉할 정도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사진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조선 여인의 이미지 컷으로, 상업적으로 유통된 사진이지 명성왕후는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1888~1939)의 경우 자신의 유고집<호암전집>(1939) 3권 95쪽에서 “(거론된) 사진을 들고 즉각 생존해 있는 명성황후 상궁들을 찾아 질문했는데 모두 부인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사진은 개화기 한 궁녀가 서양식 사진관에 출타해 찍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반발은 그치지 않았다.

- 장도빈의 희귀 사진은 ‘이승만 것’과 동일

▶ <조선일보> 1935년 신년 특별호에 실린 사진이다. 설명은 ‘규중에 숨은 고은 각씨’. <사진 3>과 같이 실려 더 관심을 끌 뿐 아니라 이승만 및 장도빈의 명성황후 사진과 옷맵시는 물론 주름의 음영까지 같은 점은 미스터리. <사진 4>

▶ 이승만의 <독립정신>(1900)에 실린 명성황후 초상. 얼굴이 일그러들어 변조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왼쪽)
장도빈의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의 명성황후 사진. 이승만의 ‘명성황후’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오른쪽)

1990년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이 사진은 논란 끝에 1997년 개정판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문제는 <르 뚜르 뒤 몽드>의 명성황후 사진이, 모두 8종인 일본의 2001년 개정판 역사 교과서에는 여전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의 소설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가 <민비암살>(1988)이라는 책의 표지에 이 사진을 올린 후 명성황후의 것으로 정설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04년 10월 미술사학자 이돈수 씨가 공개한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1894년 11월호)에 실린 명성황후 특집(부제‘은둔의 왕국 궁궐의 막후에서’) 기사도 이 논란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기사는 <르 뚜르 뒤 몽드>의 명성황후 사진과 같은 것을 올려놓고는 시중드는 ‘조선 왕비의 최고 상궁(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이라는 사진설명을 달았다.

특집 기사는 미국인 여행 전문 저널리스트 프랭크 G. 카펜터(1855~1924)가 1894년 여름 고종과 세자(순종)를 인터뷰하고 잡지의 커버 스토리로 썼다. 표지에는 그동안 학계의 해석이 엇갈린 ‘일본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의 황후’ 사진을 싣고 ‘조선 왕비의 상궁’이라고 신분을 명확히 명기했다. 때는 다른 사진과 달리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1년 전이었다.

취재팀이 발굴한 두번째 사진은 소화 2년(1927) 1월10일로 발매 날짜가 찍힌 <대원군과 명성황후>에 실린 것이다. 책 발간 직후 <조선일보>에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아 실었다’는 발매 광고까지 냈던 이 책은 직후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심지어 책을 펴낸 덕흥서림(德興書林)의 전체 출판 목록에서조차 빠져 이 책이 실제로 나오기나 했는지조차 불투명했다.

취재팀은 오랜 추적 끝에 한 개인 소장가로부터 이 책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빛 바랜 책장 군데군데 낙서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함부로 보관되다 새 주인을 만난 형색이 역력했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명성황후의 사진. 하지만 그것은 평상복에 쪽머리를 한 것으로 이미 공개돼 논란을 빚던 것 중 하나였다. 1900년 이승만(1875~1960) 박사가 펴낸 <독립정신>에 나왔던 것과 같은 얼굴이었다.

<독립정신>의 사진은 명성황후라고 확증할 근거가 부족해 공개 직후 바로 반론에 부닥쳤다. 이에 일부 해석가들은 “황실에 들어오기 전 처녀 시절 모습이다” “일본군에 쫓기면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 평복을 하고 찍은 것” 등의 주장을 폈으나 힘을 얻지 못했다.

이미 알려진 것이 다시 나왔으니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장도빈(1888~1963)의 사학자로서의 위상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의 주인공이다.

우선 당대 최고 사학자가 아무 검증 절차 없이 사진을 싣고 명성황후라는 설명을 달았겠느냐는 점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승만과 장도빈의 명성황후 사진에서 드러나는 묘한 차이점이다. 전문가들은 이승만의 ‘명성황후’는 사진을 실사한 초상화라고 입을 모은다.

명성황후의 인상착의와 외모에 대해서는 빈약하나마 몇 가지 증언이 남아 있다. 우선 <서울신문> 논설위원이었던 신동식 씨가 어느 칼럼에서 남긴 것.

- 옷맵시와 주름 음영까지 똑같은 점이 미스터리

“조선조 23대 순조의 셋째딸 덕온공주 외증손녀 윤백영 할머니는 1960년대 초 궁중 관련 문화재 고증과 보전 활동에 소리없이 공헌한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총기가 대단하고, 눈이 밝아 문화재 관련 취재 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이분이 어렸을 때 집안에서 명성황후를 뵌 어른들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비듬이 흰 분이었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어 ‘언짢은 상’으로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한다. 제 명에 못 갈 흠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국 고위 성직자의 딸이었던 비숍 여사의 증언이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래 1897년까지 네 차례 조선을 답사하면서 명성황후를 네 번 만났다. 비숍이 남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에 언급된 명성황후의 면모를 옮겨 보자.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구한말 상궁을 지낸 성옥련 씨는 노년에 “순종이 어머니 명성황후를 빼닮았다”고 증언해 관심을 끌었다. 항간에 나돌던 말로는 명성황후는 추녀, 얼굴이 천연두(마마)로 얽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마저 있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는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흥선대원군이 어린 시절 명성황후의 모습에 대한 묘사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는 입장이다. 바로 이 대목이다.
“흥선은 민 소저를 보았다. 숭글숭글 얽기는 하였지만 영특하게 생긴 소녀였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나돌았다. 일본의 낭인들이 상궁과 궁녀를 무차별적으로 죽인 다음 나중 시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얼굴에는 마맛자국이 있다’고 했고, 그 증언에 따라 사체를 확인하고 불태웠다는 것.

대다수 명성황후 연구자들은 이 말을 허구로 보고 있다. 특히 추녀라는 지적은 당시 여러 외국 사절의 인상기와 너무 거리가 멀어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 김종욱 씨는 이와 관련해 “추녀에 이어 천연두 운운하는 것은 모두 명성황후를 비하하기 위해 일본이 지어낸 말들이 아무 검증 없이 사용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마지막 사진 한 장은 <조선일보>(1935) 신년 특별호에 실린 사진이다. 이미 공개됐으면서도 명성황후 사진 논란에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간의 논란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부실한 자료를 놓고 벌어졌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은 2장. 하나는 <사진 4>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 3>이다. 문제는 이 사진을 ‘규중의 숨은 각씨’로 적고 있다는 것. 사진설명의 끝에 ‘60년 전에 박은 사진’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한다면, 이 사진이 찍힌 것은 1875년께다.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가 1884년 미국인 사진가 파웰이 지운영(화가)과 함께 고종을 알현하고 촬영한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분명한 오류다.

그럼에도 이 사진에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 두 사진의 주인공이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 여부. 다른 하나는 이승만과 장도빈의 명성황후 사진이 이것과 전체적으로 같다는 사실이다. 두 사진의 인물 나이대는 분명 다르다. 한복 차림의 여인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예복을 입은 주인공은 30대 초중반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동일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이 사진과 이승만(또는 장도빈)의 명성황후 사진의 관련성이다. 물론 두 사진의 주인공은 다르다. 그러나 사진을 세밀하게 뜯어보면 옷맵시는 물론 옷주름의 음영까지 똑같다. 따라서 이승만의 저서에 등장하는 것은 여기에 다른 얼굴을 새겨 넣은 초상화일 공산이 크다.

- 삽화는 라게리 공개분 확실시

▶ 1895년 1월25일 일본 동양당에서 발간한 <풍속화보> 제84호에 실린 고종과 명성황후 삽화.

▶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1894년 11월호)에 실린 명성황후 특집(부제‘은둔의 왕국 궁궐의 막후에서’) 기사. “시중드는 조선 왕비의 상궁(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이라는 사진설명을 달았다. 현재 공개된 사진 중 연도가 가장 앞선다.

▶ 시해 6일 후 명성황후 참사를 처음 보도, 실상을 서방에 알린 1895년 10월 14일자 <뉴욕 헤럴드>. 사용된 삽화는 중국의 향비다.

▶ 펜화로 변형된 사진. <사진 3>과 좌우가 바뀌었다. 청일전쟁 종군 특파원으로 파견된 프랑스의 빌타르 드 라게리의 1898년 작 <라 꼬레>에 실린 명성황후의 삽화.

▶ 2002년 드라마 <명성황후>가 인기 절정일 때 인터넷을 타고 등장한 사진. 조작설이 유력하다.

사진이 아닌 초상화 또는 삽화의 기록으로는 프랑스 주간지 <일루스타라시옹(l’illustration)> 1895년 11월2일자 빌타르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 기자의 기사에 실린 명성황후 삽화가 가장 실물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비극’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게재된 이 초상에는 ‘한국의 왕비’라는 설명이 붙어 있으며, 고종과 대원군의 삽화가 함께 실렸다.

2001년 이 삽화가 공개된 직후 김준희 전 건국대(정치학) 교수는 “고종과 대원군의 초상이 실제 인물과 일치하는 만큼, 이 잡지에 실린 삽화가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경우 “이 삽화의 주인공이 명성황후로 알려진 로제티 책의 사진과 동일하다”며 “이 초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공개된 삽화라는 점에서 기록적 가치가 매우 높은 중요한 자료”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진과 초상화의 의관이나 어여머리 등 스타일은 완전히 그대로지만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달랐다.

청일전쟁(1894~1895) 때 프랑스 월간지 <르 탕(le temps)>의 종군 특파원으로 파견된 빌타르 드 라게리는 전쟁 막바지인 1895년 3월께 제물포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와 1년 넘게 조선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류기간에 그는 자신이 보고 겪은 한국의 상황을 정리해 1898년 <라 꼬레(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라는 책까지 발간했다. 이 책에도 명성황후의 삽화가 들어 있다. 다시 김준희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책의 47장 삽화 가운데 4장의 왕실 사진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사진에는 명성황후·고종·대원군·왕세자(순종)가 등장한다. 특히 왕세자의 사진은 고종을 앞에 모시고 찍은 것이고, 나머지 명성황후·고종·대원군의 삽화는 각기 따로 그린 것이다.”
명성황후의 참사를 처음 서방에 소개한 매체는 시해 6일 후인 1895년 10월14일자 <뉴욕 헤럴드>다 . 이 신문 기사는 ‘서거한 한국의 왕비’라는 설명과 함께 그림 자료를 붙였는데, 그것은 중국의 향비(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의 애첩)였다. 이후 외지에서는 전혀 감이 없는 사진들을 싣기도 해 지금 와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결과로 남는다.

최근까지만 해도 명성황후라고 명명된 사진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2002년 드라마 <명성황후>가 인기 절정일 때 등장한 아주 낡아 얼굴 확인이 불가능한 사진 한 장. 이에 대해 김종욱 씨는 “드라마의 인기를 위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출처 없이 튀어나온 것을 두고 진위를 논할 수 없다. 낡고 빛을 바라게 하는 사진 기술은 이미 흔한 수법”이라며 의미를 아예 무시했다.

그런가 하면 2003년 12월 KBS가 보도한 사진 한 장도 잠깐 화제에 올랐다. 서울 수유동의 민수경 씨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사진의 주인공 뒤로 사대부급 여인을 거느린 모습이 당시 최고위직 여성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순종의 둘째부인 순정효황후 윤씨로 결론났다. 이 대목에서 다시 김종욱씨 증언.
“윤씨의 나이 든 모습이 한때 명성황후로 오해되던 적이 있었다. 이 사진 또한 윤씨다.”

- ‘명성황후는 사진 찍기 좋아했다’는 기록 남아

2005년 벽두 <조선일보>는 1895년 1월25일 일본 동양당에서 발간한 <풍속화보> 제84호에 실린 삽화를 공개했다. 그러나 이 그림으로 명성황후의 인상착의를 확인하는 것은 무리다. 고종의 경우도 분위기만 비슷하게 느껴질 뿐, 구체적으로 일치하는 대목이 없다는 점에서 더 그러하다.

사진 논쟁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발언은 건국대 신복룡(申福龍) 교수가 내세우는 ‘사진 부재론’이다. 신 교수가 말하는 요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시 사진문화가 막 시작된 상황에서 사진을 찍으면 혼이 달아난다는 미신을 믿던 시절이어서 사진 찍기를 거부했을 것. 명성황후 자신이 신변불안을 우려해 노출 기피증에 시달렸을 공산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서지학자 김종욱 씨의 말은 전혀 다르다.

“비숍 여사의 기록 중 명성황후는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는 언급이 있으며, 고종실록에도 ‘(고종이) 지시하기를, 내일 흥덕전(興德殿)에 가서 참배한 다음 영정(影幀)을 본떠 그린 초본을 보겠다’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사진이든 초상화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과연 명성황후는 어느 사진의 모습일까? 현재로서는 <코리아>와 <대원군과 명성황후>에 실린 주인공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널리 알려진 <르 뚜르 뒤 몽드> 사진과 다른 ‘평상복 사진’까지 명성황후다. 이제 어떤 새 사진이 나와 명성황후 사진 논쟁을 이어갈지 궁금하다.

글=월간중앙 특별취재팀. 사진발굴=김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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