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이숙자 작가 “힘에 부쳐 미뤘던 얼룩소 그림, 30년 만에 마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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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재현한 작업실에서 ‘군우-얼룩소’를 마무리 한 이숙자 작가(왼쪽)와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큼직한 유리창 너머 대형 얼룩소 그림 두 점이 세워져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색색 물감 통 1000개가 들어차 장관이다. 작업대 위에는 각종 붓 수십 자루와 그림 도구들이 널려 있는데 그 옆 작은 찻상에 떡과 과일이 차려졌다.

사상 최초로 전시관에 작업실 마련
4개월간 거의 매일 나와 대작 완성

지난 23일 오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층 ‘초록빛 환영-이숙자’전(7월 17일까지) 전시장은 잠시 잔칫집으로 변했다. 4개월에 걸쳐 현장에서 대작을 완성한 지향(芝鄕) 이숙자(74) 작가를 위해 미술관측이 쫑파티를 연 것이다.

“개근하다시피 전시장에 나와 몇 달을 종일 그림만 그렸어요. 1987년 한 폭을 그리고 힘이 달려서 나머지 한 폭을 놔뒀던 ‘군우-얼룩소’를 30년 만에 마무리했네요. 한국성을 찾아 그리던 소에서 한걸음 나아가 현대성에 초점을 맞췄어요. 형태는 있지만 색면이 겹치면서 추상적으로 변해가는 화면을 추구했지요.”

개관 30년을 맞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작가의 작업실이 차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천연암채들이 늘어선 화실을 그대로 전시장에 재현하자는 제안을 받은 작가가 “그럼 나까지 데려가라”고 부탁해 실험적 시도가 성사됐다. 관람객이 신기한 듯 다가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질문도 던졌는데 이 씨는 그게 창작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활력소가 됐다고 했다.

“방명록에서 ‘3번째 옵니다’ ‘70대 화가의 열정을 보니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합니다’ 같은 글을 읽으면 젊은 날 못지않은 의욕이 솟아요. 평생 한국 채색화의 정통 맥을 잇는다는 신념으로 밀고 왔는데 이 ‘한국현대미술작가’ 한국화 부문 초대전이 매듭 하나를 짓네요.”

‘보리밭’과 ‘소’, ‘이브’ 연작을 거쳐 ‘백두산’으로 이어진 지난 50년 화업은 한국성을 추구하는 긴 여정이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념비적 대작을 위해 백두산을 오르고 마음을 벼렸다. 한(恨)이 민족성처럼 연결되던 과거를 벗어나 역동적인 기세의 21세기 대한민국을 그는 15m에 달하는 ‘백두산’, 9m가 넘는 ‘백두성산’으로 예찬했다. 그는 “한국성을 그림으로 구현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날 뒤풀이에는 바르토메우 마리(50)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찾아와 “의미 있는 전시의 성공을 축하한다”고 건배했다. 그는 “상징적 형태들이 겹쳐 드러내는 겉모습 외에 내면으로 상상되는 정신적인 감동이 큰 작품들”이라고 평했다.

과천=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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