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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블로그를 세계적인 뉴스 매체로 진화시킨 미디어 혁신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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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유주의 계열 인터넷 블로그 신문인 ‘허핑턴포스트(The Huffington Post)’를 운영하는 아리아나 허핑턴(65)은 지난해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61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영웅 시리즈 <59> 허핑턴포스트의 아리아나 허핑턴 편집국장

앙겔라 메르켈 같은 국가원수와 수조원의 재산을 가진 부자들 틈새에서 정치인도, 부호도 아닌 허핑턴이 이 정도 순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그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허핑턴은 2005년 5월 허핑턴포스트를 공동 창간해 지금까지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2011년 미디어 기업 AOL이 허핑턴포스트를 3억1500만 달러에 매입하면서 돈 걱정 없이 운영 중이다.

허핑턴포스트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칼럼니스트가 집필하는 블로그를 바탕으로 미디어를 구성한다는 혁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했다. 정치·미디어·비즈니스·엔터테인먼트·생활·환경·국제뉴스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종합신문의 오피니언 난이나 심층 기사를 읽는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오프라인 신문보다 수준이 더 높은 인터넷 매체로 평가 받는다. 현재 미국판 외에 영국·캐나다·마그레브 판은 허핑턴포스트가 직접,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독일판 등은 현지 언론사와 제휴해서 운영하고 있다.

아리아나 허핑턴이 걸어온 길

1950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기자 출신의 관리 컨설턴트였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와 어머리 엘리 사이에서 태어남. 본명 아리아나 스타시노풀로스. 종교는 그리스 정교.
1966년 부모 이혼 후 16세 때 영국으로 이주. 케임브리지대 거튼 칼리지에서 경제학 전공. 외국인으로는 처음, 여성으로는 세 번째로 케임브리지 학생회장을 맡음.
1973년 『여성인 여자(The Female Woman)』 출간.
1980년 미국 뉴욕으로 거처를 옮김. 80년대 후반 내셔널 리뷰에 기고하면서 보수 논객으로 자리 잡음.
1981년 그리스계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의 전기 『마리아 칼라스-전설 뒤에 있는 여인』 집필.
1989년 화가 파블로 피카소 전기 『피카소-창조자이자 파괴자』 출간.
1986년 마이클 허핑턴과 결혼.
1994년 공화당 중간 선거 지원.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밥 돌 지지.
1997년 이혼. 현재 두 딸 크리스티나·이사벨, 여동생 아가피와 함께 살고 있음.
2000년 유고슬라비아(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에 반대.
2003년 캘리포니아주지사 선거에 무소속 출마. 환경운동단체 ‘디트로이트 프로젝트’ 지도.
2004년 민주당 존 케리 후보 선거운동 지원.
2005년 허핑턴포스트 공동 창간
2009년 포브스가 처음으로 선정한 ‘미디어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2위에 오름. 영국 신문 가디언의 ‘미디어 인물 100명’ 42위를 차지.
2011년 AOL이 허핑턴포스트를 3억1500만 달러에 매입.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 손잡고 프랑스어판 ‘르 허핑턴포스트’ 창간.
2013년 아사히신문과 손잡고 일본어판 ‘허핑턴포스트 재팬’ 운영.
2014년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서 한국어판 서비스.

개방형·쌍방소통형 뉴스로 차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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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창간 11주년을 맞는 허핑턴포스트는 짧은 시간 안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터넷 매체로 자리 잡았다. 허핑턴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지명도를 적절히 활용했다. 정치 칼럼니스트, 라디오 출연자에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경력과 13권의 책을 쓴 저술가로서의 명성을 십분 활용해 훌륭하거나 이름 있는 필자를 허핑턴포스트에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저명 역사학자이자 정치 칼럼니스트이며 사회 비평가인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다. 슐레진저는 케네디 행정부에서도 일했던 원로 정치인으로 블로그 스타일의 허핑턴포스트에 맞지 않는 인물로 볼 수 있다. 2005년 허핑턴포스트에 처음 글을 쓴 슐레진저는 2007년 세상을 떠났지만 기여한 바가 크다. 통찰력 있는 인물의 무게감 있는 글을 받아 올림으로써 허핑턴포스트를 다른 인터넷 매체와 차별화하는 고급 미디어로 만든 것이다.

허핑턴은 허핑턴포스트를 일반 매체와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다. 블로그를 뉴스 매체로 진화시킨 것이 그 하나다. 기존의 폐쇄적인 블로그를 개방형·쌍방소통형으로 바꾸면서 색다른 뉴스 매체 특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창조적인 생각을 가진 250여 명의 블로그 필진으로 시작한 허핑턴포스트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반인이나 기자들이 모르는 특수한 뉴스를 생산하고 이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의견을 하나의 뉴스로 만드는 독특한 매체 특성을 띠기 시작했다. 허핑턴포스트 스타일의 뉴미디어다.

인터넷 미디어, 블로그 미디어라는 허핑턴포스트의 특징은 저비용 고원고료 시대를 열었다. 기존 매체는 종이값·인쇄비 등 경상비가 많이 들어 필자에게 충분한 원고료를 지급하기 쉽잖은 형편이었다.

하지만 허핑턴포스트는 인터넷 서버 운용과 편집 인건비를 제외하고는 들어갈 비용이 거의 없었다. 광고 수입을 대부분 원고료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충분히 지급할 수 있었다. 글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매체가 되었기에 갈수록 더 좋은 필진, 더 좋은 글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필자들은 원고료 수입 외에 독자들이 다는 댓글 등으로 인터랙티브한 상호작용을 즐길 수 있다. 쌍방형 매체가 가능해진 것이다.

보수 논객으로 시작해 공화당 정치인 조언자로 활동

아리아나는 23세이던 1973년 스타시노풀로스라는 성으로 『여성인 여자(The Female Woman)』라는 책을 펴냈다. 여성 해방 운동 전반을 매섭게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유명한 급진좌파 여성해방운동가였던 저메인 그리어(76)를 공격했다.

당시 그리어는 여성 해방운동의 주류였다. 그리어는 1970년에 펴낸 『여자 내시』라는 책에서 “전통적으로 교외에 거주하며 소비를 즐기는 핵가족이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활력을 뺏어간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자각을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핑턴은 이와 반대의 입장에 섰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 해방운동가들은 전체적인 여성해방이 모든 여성의 삶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실은 강한 레즈비언 경향을 가진 여성들의 삶만 바꿔놓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적인 여성운동 입장에서 좌파적인 여성운동을 공격한 것이다.

미국으로 옮긴 허핑턴은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보수적인 뉴스와 해설, 그리고 오피니언을 다루면서 가장 널리 읽히고 영향력이 있는 잡지이자 웹사이트’를 자처하는 내셔널 리뷰에 글을 기고하면서 보수 논객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정치인 마이클 허핑턴과 1986년에 결혼해 1997년까지 살았다.

그때 얻은 성이 허핑턴이다. 결혼 직후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로 이주했다. 마이클이 이 지역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1992년 선거에서 마이클은 상당한 표차로 승리해 1993~95년 캘리포니아 연방하원의원을 지낸다.

1994년 마이클은 캘리포니아주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거물 다이앤 파이스타인과 접전 끝에 박빙으로 낙선했다. 허핑턴은 당시 유세를 지원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가 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뉴트 깅리치, 밥 돌 같은 공화당 정치인의 신뢰할 만한 조언자로 활동하게 됐다. 명석하고 연설을 잘하며 아이디어가 샘솟는 이 여성은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로 부상했다. 뉴트 깅리치가 연방하원 야당 원내총무로서 ‘공화당 혁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승을 거둔 1994년 중간 선거를 지원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밥 돌을 지지하기도 했다.

주지사 선거 나서고 환경운동 지원하기도

허핑턴은 미국의 인기 있는 보수 방송인으로도 활동했다. 1990년대 라디오 등에 출연해 보수주의 입장에서 정부에 따끔한 한마디를 날렸다. 하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자유주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허핑턴은 2000년 유고슬라비아(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세르비아 폭격에 반대했다.

그러다 2003년 무소속으로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선거에 나섰다. 허핑턴은 당시 대결을 ‘하이브리드 대 허머’라고 표현했다. 자신은 친환경 자동차인 도요타 프리우스를 모는 반면 상대인 공화당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후보는 연료가 많이 드는 허머(무거운 군용 험비를 민간용으로 개조한 차량)를 몰고 다니는 것에 빗댄 표현으로 허핑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선거에선 졌지만 허핑턴은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됐다.

2000년 이후 허핑턴은 환경운동단체인 ‘디트로이트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이는 환경보호를 위해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대체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를 개발하도록 압력을 넣는 공공 이익집단이다. 2003년 대대적인 모금으로 방송광고를 하면서 주장을 널리 알렸다. 미래를 내다보고 친환경 자동차 개발을 주창한 그의 업적은 지금도 널리 칭송된다. 2004년에는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민주당 전국 대회에 참석하는 등 진보 인사로 이미지 변신했다.

그런 그가 운영하는 자유주의 매체 허핑턴포스트는 날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지식인 사회에서만 인기 있던 것이 대중에게 날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허핑턴포스트라는 미디어 형식도 좋은 모델로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콘텐트만 좋으면 미디어는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허핑턴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정지원 자유기고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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