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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2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상오 11시35분에 시즈오까(정강)역을 출발한 국철 도오까이(동해)선 상행열차는 불과 10분만에 취재팀을 시미즈(청수)역에 내려주었다.
시미즈시는 1924년까지도 에지리(강고)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역사 깊은 여관거리였다.
에도(강호)막부가 통신사 일행을 위해 마련한 숙사도 이곳에 있었다.
신유한공은 에지리의 숙사에 대해 『해유록』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집은 돈많은 사람의 사저인데 널찍하고 깨끗하며 강과 바다의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정원·연못·화초와 기석들이 가지가지로 기이하고 절묘하다』

<서두른 보람도 없이 일행의 출발 늦어져>
에도로 가는 도중의 숙사가 대부분 절이었는데 이곳만은 지방부호의 저택을 빌어 영빈관으로 썼던 모양이다.
부호의 사저였다는 옛 영빈관이 지금 시미즈시의 어디쯤인지, 어떻게 모습이 바뀌었는지 알아보려 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이곳에서 신공일행은 막부의 장군이 특별히 파견한 영접사의 환대를 받고 하루밤을 묵는다.
그런데 다음날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져 일행의 출발을 늦게 만들었다.
이날은 다음 숙사까지의 길이 멀어 닭이 세 홰를 치자 출발을 서둘렀다.
그러나 막상 출발하려니 말이 없다.
당시에도 일본에서는 관이 개인의 말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없고 돈을 주고 빌어야 했다. 그래서 부자들은 삯을 받고 말을 빌려주어 돈을 벌었다.
그런데 이곳의 말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가 돈을 아낀답시고 말 빌리는 값을 너무 깎는 바람에 말 임자들이 모두 피해버린 때문이었다.
무로마찌(실정)시대 일본사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인부와 우마를 강제 동원했다.
이때문에 경상도 문경 새재(조령)부근의 농민들은 일본사절이 올 때마다 치르는 부역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 말 임자들이 말을 빌려주는 값이 맞지 않는다고 귀한 외국의 사절일행이 써야할 말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상업주의 풍토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의 수직구조와 일본사회의 수평구조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에도시대에 이미 이 정도로 성숙된 상인 기질과 주판문화가 오늘의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든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말 소동으로 신공일행은 일찍 서두른 보람도 없이 날이 밝은 뒤에야 겨우 준비를 갖추고 떠날 수 있었다.
이날의 노정은 삿다(살수)고개와 후지(부사)내를 건너 미시마(삼도)까지 가는 1백30리길이었다.
삿다고개는 에도로 가는 도오까이도에서 하꼬네(상량)고개 다음으로 험난한 곳이었다. 바다에 면한 벼랑에 억지로 길을 내었는데 파도가 들이치면 그대로 휩쓸려 나가 생명을 잃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오야 시라즈 꼬시라즈」(친부지, 자부지)라 불린곳이다. 부자가 같이 지나가다가 아버지가 모르는 사이에 자식이 없어지거나 자식이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잃는 험로라는 뜻이다.
조선통신사가 이 길을 왕래하게 되자 에도막부는 1655년과 1682년 두차례에 걸쳐 대역사를 벌여 산위로 넘어가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덕천이 여우길 초청 전용 유람선서 즐겨>
신공일행이 이곳을 지날 때는 새길이 뚫린 뒤였다. 그런데도 『해유록』은 삿다고개의 험난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갯길은 바다를 굽어보는데 때때로 벼랑 골짜기에서 쳐 올라오는 풍파가 사람을 칠 것만 같다』삿다고개 못 미쳐 오끼쓰(흥률)라는 곳에는 바다를 굽어보는 산록에 우리의 통신사와 인연이 깊은 세이겐(청견)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청견사는 1607년과 1624년 두차례 통신사 일행이 머물러 간 곳이다.
일본측의 국교정상화 요구에 대한 이왕조의 회답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던 1607년 통신사때의 정사 여우길은 귀로에 이곳에 머물면서 「도꾸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의 초대를 받아 청견사 앞 바다에서 장군전용의 유람선을 타고 미호(미보)반도의 경승을 즐기기 까지 했다.
후에 에지리와 미시마의 숙사가 정비되자 이곳에서 묵는 일은 없게 됐으나 절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와 역대 통신사들이 반드시 들러가는 곳이 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 현재 절에 전해지고 있는 시·그림·현판만도 50여점에 달한다.
불행하게도 신공일행은 아침출발이 늦어져 길을 서두르는 바람에 이곳을 그냥 지나쳐야했다.
신공은 『해유록』에 『20리를 가서들으니 길 왼편에 청견사가 있는데 바닷가의 명승을 이루고 있다 하나 행차길이 바빠 구경할 수가 없다』고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있다.
시미즈역에서 청견사까지는 택시로 8분거리였다. 길옆 축대위로 산문이 높이 서있고 그 너머로 울창한 나무와 절의 지붕이 멀리 보인다. 산문과 절의 지붕만 보아도 규모가 큰 고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층계를 올라 산문에 들어서니 「동해명구」란 큼직한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금곡거사란 낙관이 찍혀있다. 금곡이란 1711년 통신사때 수행했던 초량왜관의 훈도를 지낸 사람이다.
본사 마당에 들어서니 건물마다 붙어있는 현판이 모두 우리통신사 일행이 남긴 글이다. 본당에 걸린 「흥국」이란 현판은 1655년의 정사 조형의 글이고 본당 옆 방장에 붙은 「조음각」현판은 금곡, 그리고 2층 종루의 「경요세계」란 현판은 1643년 통신사때의 제술관 박안기의 필적이다.

<청수시내 부녀자들 달래캐러 차타고 와>
이곳이 일본땅에 있는 절이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주인을 찾으니 「미즈노」(수야)란 젊은 스님이 나와 본당으로 안내한다.
본당안에는 정면의 중간문지방위에서 양쪽벽에 이르기까지 대소 11개의 편액·현판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불공을 드리는 법당이라기 보다는 서예전시장같은 느낌을 주었다. 글씨의 주인공들도 1711년의 정사 조태억, 1748년의 정사 홍계희, 1764년의 서기 김인겸 일일이 꼽기도 힘들 정도다. 이 절에 보관되고 있는 1764년 통신사때의 화원 김유경의 4곡병풍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으나 완곡히 거절한다. 그림의 훼손을 막기위해 일체 공개를 안 하기로 했다는 얘기다.
이 그림은 금강산과 양양의 낙산사, 그리고 화조를 그린 걸작으로 18세기 중엽 이조의 수묵화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이 절을 찾았던 우리 사절들의 글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으나 당시 이들의 시심(시심)을 움직였던 아름다운 경치는 현대화의 물결에 밀려 찾아볼 수 없다.
절의 경내를 가로지른 철길도 그렇거니와 절에서 내려다 보였다던 미호의 절경도 해변가에 새로 들어선 고가도로와 창고건물 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청견사를 뒤로하고 삿다고개를 찾았다. 택시로 5분거리다. 「오야 시라즈 꼬시라즈」로 악명 높던 바닷가 벼랑길에는 방파벽이 세워지고 그 안쪽으로 국도1호선 동명고속, 국철 동해선이 포개지듯 달리고 있다.
「도꾸가와」막부가 조선통신사의 안전을 염두에 두고 새로 내었다는 고갯길은 산중턱까지만 차가 올라갈 수 있고 그 위로는 등산로가 되어 있었다. 등산로 입구에 「고향의 길」이란 팻말이 서 있다. 그 차길이 끝나는 곳에 두 대의 승용차가 서있고 몇명의 아주머니와 어린이들이 달래를 다듬고 있다. 시미즈시내에서 놀러 나왔던 길에 달래를 캤다고 했다.
삿다고개에 얽힌 옛 통신사의 일을 들려주니 처음 듣는 얘기라며 무척 신기해한다.
자가용을 타고 삿다고개로 달래를 캐러 나온 부인들에게서 이곳을 흘러간 세월의 길이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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