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역임’은 과거 직위에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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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어떤 사람의 직위나 경력 등을 소개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가 있다. 바로 ‘역임’이다. “그는 ○○부 장관을 역임 중이다” “그는 ○○협회 회장을 역임한 뒤 퇴직 후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등처럼 사용하곤 한다.

위에서 ‘역임’은 바르게 쓰인 표현일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역임’을 ‘직무에 임하다’ 정도의 뜻으로 알고 쓰는 듯하다.

‘역임(歷任)’은 ‘지낼 역(歷)’ 자와 ‘맡길 임(任)’ 자가 만나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쳐 지냄을 의미한다. 즉 과거에 지낸 여러 직위를 언급할 때 쓰인다. 따라서 ‘역임 중’이라고 하면 과거에 여러 직위를 지낸 중이라는 이상한 뜻이 된다. ‘역임’은 과거 사실이므로 ‘중’이나 ‘현재’와 결합해 쓰일 수 없다. “A, B, C 등을 역임했다”에서처럼 과거의 직위를 나열할 때만 ‘역임’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올해 말 퇴임을 앞둔 그는 정부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주요 관직을 역임한 매우 청렴한 사람이다” 등과 같이 쓸 수 있을까. 여러 직위를 나열한 게 아니므로 틀린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부 요직’과 ‘주요 관직’은 과거에 지냈던 복수의 자리를 의미하므로 ‘역임’과 함께 쓸 수 있다.

‘역임’은 다소 어려운 한자어이고 정확한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가급적 ‘맡다’ ‘지내다’ ‘거치다’ 등 쉬운 우리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의 예문도 “그는 ○○부 장관을 맡고 있다” “그는 ○○협회 회장을 지낸 뒤 퇴직 후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와 같이 고쳐 쓰면 된다.

김현정 기자 nom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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