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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올바른 습관 익히면 성공한다, 큰일하려면 시간 약속부터 지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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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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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서울대 사회과학관 건물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랐다. 손목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2시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준구(67)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의 약속을 4분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택시 기사가 학교 안에서 길을 헤매지만 않았어도 10분은 족히 일찍 도착했을 터다. 이날따라 유난히 크고 복잡한 서울대 캠퍼스가 더 야속하게 느껴졌다. 더 일찍 출발하지 않은 걸 후회해본들 소용없었다.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제자들에게 보내는 아홉 번째 편지’를 읽은 게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글에서 A4용지 2장하고도 5분의 1 분량으로 시간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원고지로 치면 24장 정도의 짧지 않은 글이다. 숨 가쁘게 5층까지 달린 결과 약속 시간 2분 전에 연구실 문을 노크할 수 있었다.

경기고·서울대 수석 졸업, 프린스턴대 석·박사
공부 재밌는 사람 없어, 효도하려고 했죠
자녀에겐 공부 억지로 안 시켜, 행복하면 그만

조부모부터 4대가 시간 약속 철저히 지켜
평생 하루 7시간 수면, 일주일에 두 번 테니스
학교 화단 가꾸기 등 소소한 일상이 행복

“똑똑.” 문을 열고 나온 이준구 교수는 사진으로 본 그대로 인자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지난해 정년 퇴임을 하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일주일에 한 번씩만 강의한다. 하지만 그의 강의는 퇴임 후 더욱 빛을 보고 있다. 한국형 온라인 무료 강좌인 ‘K-MOOC’에서다. 지난해 10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K-MOOC 이용자는 100만 명이 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게 바로 이준구 교수의 ‘경제학 들어가기’다. 현재 강좌의 수강신청 누적 건수는 1만3000여 건으로 1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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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졸업식 때 4개의 메달을 받은 이준구 교수(가운데 아래)가 친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왼쪽). 당시 경기중 수험표.

그는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는 미국 아이비리그인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뉴욕주립대 올버니 캠퍼스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고, 84년부터 지금까지 32년간 모교인 서울대에 재직 중이다.

그는 재정학과 미시경제학의 권위자다. 그가 저술한 미시경제학·재정학·경제학원론 관련 교과서는 89년 이후 35만 권이 넘게 판매됐다.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아 팬클럽이 있을 정도다. 2007년에는 정부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고, ‘강남 좌파 교수’라는 별명도 얻었다.

다음 날 먹을거리 걱정하던 어린시절

그의 경력을 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부잣집 자제’거나 ‘고생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년시절 그의 집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사업하던 아버지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면서 일자리를 잃었고, 이후 그가 중2때까지 약 10년 동안 실직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아버지 대신 세 자매를 부양한 건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조산원을 운영하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한 달에 몇 명의 신생아를 받아내느냐에 따라 집안 형편이 달라졌다. 신생아가 10명 넘게 태어날 때는 여유가 있었지만, 한 달에 3명도 안 될 때는 당장 다음 날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배운 게 있어요. ‘하늘은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겁니다.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더군요. 다음 날 먹을 식량 걱정을 하면서 잠이 들면 그날 새벽에는 반드시 ‘애가 태어날 것 같다’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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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귀국하고 처음 찍은 가족사진. 당시 혜원씨는 6세, 윤복씨는 4세였다.

집안 형편은 여유롭지 않았지만 학군에 따라 서울 5대 명문초 중 한 곳인 혜화초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시가 있던 때라 경기중 합격생을 얼마나 배출했느냐가 학교의 평판을 결정했는데, 혜화초는 당시 전교생 420명 중 40명 정도를 경기중에 진학시키는 곳이었다. “혜화초에는 명륜동 1~4가에 사는 학생들이 섞여 있었어요. 1가는 부자동네, 2, 4가는 중산층이 많았지만, 제가 살던 명륜동 3가는 산동네를 끼고 있어 가난한 동네로 분류됐죠. 선생님이 수업 중에 떠드는 애한테 주소를 물어 ‘명륜동 3가 산다’고 답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사교육은 물론,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가난했던 그의 집은 그럴 형편이 안됐지만 그의 성적은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보다 뛰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와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귀여움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종친이었던 2학년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전 과목 ‘수’를 줬고, 6학년 때 선생님은 치맛바람 일으키는 엄마를 둔 애들보다 그를 더 예뻐했다. 선생님의 신뢰를 얻으니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사교육을 안 받아도, 엄마가 극성을 떨지 않아도 반에서 1등을 했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게 됐죠. 이때 이룬 성취가 제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좋은 분들을 담임선생님으로 만난 것 자체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교수로 근무하면서 학생들과 소통에 발 벗고 나선 것도 그때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녀 교육은 욕심 부려도 맘대로 안 돼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는 또 있다. 아버지의 교육열이다. 집은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교육열은 지금의 대치동 못지않았다.

당시 경기중은 480명 중에 350명이 서울대에 합격할 정도로 수재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좋은 등수를 받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덜컥 반 1등을 했지만 계속 1등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첫 시험에서 1등 성적표를 받은 아버지는 2등 성적표를 갖다 드려도 만족할 줄 몰랐다. 중2 때는 반에서 4등을 했다가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쫓겨나서 어디로 갔나.

“숙부님 댁으로 피신해 있었다. 3일이 지나니까 누나가 데리러 오더라.”

-사춘기 때라 예민했을 텐데 반항은 안 했나.

“반항하거나 그럴 생각은 못 했다. 어렸을 때부터 심성이 순한 편이었다. 아버지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얼마나 우리 삼남매를 위해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특히 조산원을 운영한 어머니는 낮에는 물론 한밤중에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셨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전교 7등을 했고, 고2 여름에 전교 1등을 했다. 이것도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다. 고1 때까지 성적을 깎아 먹은 과목이 음악·미술·체육이었다. 필기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실기평가에서 사교육 받은 애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더라. 세 과목은 늘 70점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음·미·체가 전 과목 평균을 3점 이상 떨어뜨렸다. 하지만 고2 때 우연히 반장이 된 이후 선생님들이 예체능 실기 점수를 후하게 줬다. 이후로는 전교 1등을 했다.”

-아버지가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나.

“전혀. 초등학교 때 문제를 풀면 답을 맞춰준 적은 있다. 하지만 모든 공부는 혼자 힘으로 했다. 고2 때 영어회화 레슨 1년 정도 받은 걸 제외하면 사교육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했나보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누가 ‘공부가 재미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한테 효도하고 싶고, 실망 드리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했을 뿐이다. 하지만 밤잠을 설쳐가면서 공부한 한 적은 없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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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가 2004년 서울대에서 경제학원론 강의를 열정적인 모습으로 하고 있다.

-아버지처럼 본인도 교육열이 높은가.

“엄한 아버지 밑에서 커서 그런지 오히려 반대다.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닌데, 뜻대로 안되더라. 둘 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태어나 사교육을 받거나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첫째는 공부를 곧잘 해 큰맘 먹고 직접 가르치려다가 실패했다. 중2 때 미지수의 방정식을 설명하다가 ‘넌 이것도 못하느냐’고 했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 그외에도 비슷한 경험이 많다. 초등학교 때는 천자문을 익히게 하려다 하루 만에 그만뒀고, 하와이로 교환교수를 가게 돼 미리 영어 좀 가르치려다가 일주일도 안 돼 포기했다. 원래 집요한 성격이 못 된다. 나 자신이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시키지 말자.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는 생각에 다 포기했다.”

-하지만 두 자녀 모두 훌륭하게 컸는데, 비결이 궁금하다.

“첫째는 서울대를 나와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석·박사를 했고, 둘째는 고려대를 졸업했다. 특별한 방법은 없다. 늘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 거 외에는 별게 없다. 아내도 극성스러운 성격이 아니다. 우리 둘 다 공부 잘하는 것보다 좋은 습관을 기르는데 더 신경을 썼다.”

50만 해도 되면 굳이 100을 하지 않아

그가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좋은 습관은 크게 다섯 가지다. 시간 약속 잘 지키기, 끼니 거르지 않고 건강한 음식 잘 챙겨 먹기, 운동 꾸준히 하기, 휴식 잘 취하기, 스트레스 받지 않기다. 그는 이를 자녀들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전파하려고 노력 중이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8년 동안 홈페이지에 올린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곳곳에도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고, 아홉 번째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올바른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은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사회에서 훌륭한 성공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다.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알 거다. 출석을 부를 때 지각하는 학생들은 이유 불문하고 결석 처리하고, 리포트를 예정된 날짜보다 늦게 내면 아무리 내용이 훌륭해도 감점을 한다. A·B·C 등급으로 매긴다고 했을 때 사흘 늦게 내면 0점으로 처리한다. 시간 약속을 지키는 건 굉장히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다닐 때 강의 하나 시간 맞춰 못 듣고, 리포트 하나 제 날짜에 못낸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큰일을 할 수 있을까. 안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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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가 서울대 사회과학관 앞 야생화 화단 앞에서 웃고 있다. 그는 1995년부터 21년 동안 이 화단을 손수 사진은 첫째 딸 혜원씨의 서울대 졸업식 때 모습.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된 건가.

“집안 내력이다. 조부모님·부모님·우리 부부·자녀 등 4세대를 합쳐 시간 약속 제대로 안 지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증조할아버지와 관련한 일화도 있다. 당시 할아버지는 충남 서천에 살면서 전북 군산으로 일을 보러 다녔는데, 서천에서 군산을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야 했다. 나룻배가 출발하는 시간이 오전 9시라고 하면 할아버지는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7시30분이면 강가에 가서 배를 기다렸다더라.”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건강과 관련한 내용이 많다.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이뤄도 결국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큰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라고 해서 정한 게 ‘몸 튼튼히, 마음 바르게’였다. 서울대에 진학해도, 대기업에 입사해도 건강하지 않고, 인성이 훌륭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

-본인은 어떤 습관 갖고 있나.

“나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지키며 살고 있다. 무엇보다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 제때에 끼니를 챙겨 먹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독일 베를린으로 출장 갔을 때 딱 한 번 저녁을 늦게 먹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운동도 꾸준히 한다. 일주일에 두 번씩 테니스를 꼭 치고, 그렇지 못할 상황이면 30분 이상 산책을 한다. 또 하루에 7시간 이상 꼭 잔다. 잠이 안 올 때도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 압박감에 쉴 수가 없었다. 휴식 시간 없이 매일 공부만 했다. 주말에 한 번 아내와 함께 장 보러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한 번은 이틀을 내리 잠만 잤다. 무리해서 공부한 게 탈이 난 거다. 휴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후에는 주말에 쇼핑도 가고 TV도 보면서 쉬었고, 한국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안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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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안 받는 비결은.

“욕심을 안 부리면 된다. 50만큼만 일해도 되면 50만큼만 한다. 굳이 100이 되려고 애쓰거나 무리하지 않는다. 살면서 피곤함을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술·담배를 안 하고 일주일에 6일은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매주 일요일 오전에는 아내와 함께 마트에 간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1976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해온 일이다. 카트를 끈 횟수만 2000번 정도 될 거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소소한 일상에 만족하는 게 행복이다.”

-화단을 가꾸는 것도 그래서인가.

“그렇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건물 1층에 내 손으로 직접 가꾼 야생화 화단이 있다. 132㎡(40평) 규모 아파트의 작은 방 크기 정도다. 1995년 3월에 황무지였던 곳을 일구고, 모종을 사다 심었다. 지금은 제법 울창해졌다. 초롱꽃·피나물·까치수염·어성초 등이 무성하게 자랐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되더라.”

-자녀들이 좋은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왔나.

“원래 잔소리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케이크나 떡볶이로 식사를 대신하면 ‘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말한 정도다. 우리 부모님처럼 나도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다. 부모가 먼저 좋은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은 저절로 따른다고 믿는다.”

│이준구는
1962년 서울 혜화초 졸업
1965년 서울 경기중 졸업
1968년 서울 경기고 수석 졸업
1972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상과대 수석)
1978년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 석사학위 취득
1981년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1980~84년 미국 뉴욕주립대 조교수
1984~2015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1999년~2000년 제15대 한국재정학회 회장
2003년~2004년 한국경제학회 이사
2015~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 저서 : 『미시경제학』 『경제학원론』 『재정학』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경제』『36.5℃ 인간의 경제학』
□ 인생의 롤모델, 인생을 바꾼 책, 좌우명 : 모든 사람과 책과 경험에서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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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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