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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북극 연안에 잇단 군사기지, 새로운 철의 장막 내려오고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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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4 면

1 지구온난화로 북극권이 녹으면서 자원 개발과 북극항로 개방을 놓고 강대국들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인 그린란드는 북극권 개발의 교두보로 떠오르고 있다. 눈이 일찍 녹아내린 그린란드 수도 누크의 학교 앞 운동장에서 현지 어린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2 그린란드 중서부 일루리사트의 아이스피오르 앞바다에 떠 있는 거대 빙산. 최정동 기자

북극이 뜨거워지고 있다. 빙하가 녹으며 드러난 ‘북극의 전략적 가치’에 강대국들이 눈을 돌리고 있어서다. 북극의 가치를 북극 항로나 온난화에 두는 건 빙산의 일각을 보는 거다. 빙산은 90%가 수면 아래에 잠겨 있다. 북극이 달아오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수면 아래 ‘북극의 국제 정치’를 읽어야 한다.


북극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미국·러시아·중국 같은 강대국 간의 거리가 놀랍도록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북극이 엄청난 군사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다. 북한이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는 건 사거리를 늘려 미국을 사정권에 두기 위해서다. 만약 북한이 미사일 기지를 북극에 둔다면 북반구 전체가 사정권에 들어간다. 냉전기 북극해 주변에 미국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군사기지를 건설했던 것도 이런 이유다.


미국은 지금도 알래스카 포트그릴리에 미사일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반구 전체를 사정권에 둘 수 있는 북극을 가장 이상적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배치 지역으로 본다. 빙하가 두꺼워 핵잠수함이 숨어 있기도 유리하다. 미·러 간 영토가 가장 근접한 곳(베링해협, 91㎞)도 북극권이다.

북극 항로 이용 시 통행료 받겠다는 러시아미국의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지난해 8월 세미나를 통해 “북극에 새로운 철의 장막(New iron curtain)이 내려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세미나의 부제는 ‘러시아의 전략적인 북극 접근’이었다. 러시아는 북극 연안 8개국(A8, 미국·캐나다·러시아·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아이슬란드·덴마크) 중 북극에 가장 많은 영토를 접하고 있는 나라다. 1987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무르만스크 연설을 통해 “북극권을 개방하고 북극을 평화지역으로 두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최근 북극의 잠재력이 드러나며 입장이 바뀌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36척의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는 자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통과하는 북극 항로 이용 시 자국 쇄빙선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종의 통행료를 받겠다는 거다. 러시아가 경제적 가치가 큰 북극 항로를 욕심 낼 경우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남중국해처럼 북극 항로가 미·러의 새로운 갈등 지역으로 떠오를 수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때처럼 러시아와 서방 간의 긴장 관계가 다시 고조될 수 있다.


영국의 일간지 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는 1년 전 북극 방어를 전담하는 북부합동전략사령부를 창설했다. 노바야젬랴 섬과 틱시에 S-400 장거리 지대공미사일을 배치했고 보레이급 핵추진 잠수함 3척도 배속시켰다. 여기다 북극해 연안 6곳에 새로운 군사기지를 건설 중이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뿐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캐나다 등 주변국의 군비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북극이 빙하 냉전(ice-cold war)을 넘어 본격적인 충돌의 장(hot war)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 북극에서 충돌하는 건 규칙(Rule)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남극조약이 존재하는 남극과 달리 북극은 포괄적인 국제법 규정이 확립되지 않아 ‘미확정의 대륙’으로 남아 있다. 국제사회가 남극협약을 참조해 국제규약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각국의 입장 차가 크다. 지난달 열린 북극서클포럼(Arctic Circle Forum)에서 킴 킬센 그린란드 총리는 기조연설을 통해 “최근 수년간 극지 지역은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지만 세계 여러 국가들은 극지 전략을 독자적으로 수립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린란드 수도 누크 중심부의 한스에게데 호텔에 걸린 국기들. 왼쪽부터 아이슬란드·페로제도(덴마크령)·덴마크·그린란드(덴마크령)국기.

올해 과학개발 협정 맺어질 수도유엔 해양법협약(CLCS, 1982년)을 기준으로 분쟁 조정을 하고 있지만 결론 난 건 없다. 각국은 EEZ와 대륙붕 경계획정, 심해저구역 귀속 문제 등을 두고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중국 같은 비북극권 국가의 셈법도 복잡하다. 대륙붕경계선이 확정될 경우 공동관할인 국제해저구역이 288만㎢에서 34만㎢로 지금의 9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차라리 불확실한 상태가 이어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갈등에도 96년 창설된 북극이사회(Arctic Council)를 중심으로 ‘새로운 규칙’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북극이사회는 연안 8개국과 북극 6개 원주민 공동체가 상시 참여 그룹을 이루고 한·중·일 등 12개국이 옵서버로 참여하고 있다. 국제기구가 아닌 지역협의체로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대화체로서 협력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기후변화 대응이나 원주민 지원 같은 문제는 북극이사회가 적극적으로 합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2011년엔 조난·구조와 관련해 북극 관련 첫 조약이 탄생했고 2013년에도 유류제거협정에 합의했다. 연성 이슈 중심의 협력이 차츰 쌓여가는 것이다. 창설 20년을 맞는 올해는 의장국인 미국(2015~2017년)을 중심으로 과학 개발과 관련된 협정이 맺어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엔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우려해 현재 군사기지 및 기존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 외에 군사적 이용을 막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규칙 부재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유지 비극’을 막기 위한 합의가 조금씩 마련되는 셈이다.


물론 돈이 걸린 경제개발 부분은 개별 국가 간 양자협력이 중심이다. 하지만 북극이사회 외에 아이슬란드가 주도하는 북극서클포럼, 유럽연합(EU)-러시아의 바렌츠위원회 등 다양한 비공식 회담이 열린다. 북극이사회 옵서버들의 참여가 늘면서 그동안 연안 8개국 중심의 배타적인 논의를 넘어 비북극권 국가에도 북극 개발 참여의 기회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북극서클포럼에서 만난 폴 버크먼(과학외교)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북극은 공식적인 거버넌스 메커니즘은 없지만 2011년부터 공공·개별 영역에서 다양한 협력이 이뤄지기 시작했다”며 “북극은 어느 국가의 영토도 아닌 남극과는 달리 개별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과 공해·공동수역 등이 얽혀 있는 지역이어서 기존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중·일 북극을 향해 ‘따로 또 같이’2013년 북극이사회 정식 옵서버로 공동 가입한 한·중·일 3국은 북극에 대한 관심이 높다.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거쳐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는 것보다 북극 항로를 통할 때 운항 거리가 30% 이상 줄어들기 때문이다. 비북극권 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협력도 활발하다. 지난 4월엔 서울에서 제1차 북극협력대화가 열렸다. 당시 3국은 국제 무대에서 북극 관련 협력을 강화하자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신경전도 치열하다. 중국은 공식적인 북극 전략을 내놓고 있진 않지만 ‘일대일로(一帶一路)’와 ‘해양강국’이라는 국가 대전략의 일환으로 북극을 바라본다. 2013년 상하이에 북극연구센터를 설립했고 세 번째 쇄빙선 도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영회사를 기반으로 러시아·그린란드(덴마크령) 등 북극 국가에 대한 대규모 투자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군사적 움직임도 있다. 중국은 지난해 9월 러시아와 연합 해상 군사훈련을 하기 위해 5척의 전투함을 북극해 입구 베링해로 파견했다.


일본은 과학 중심으로 북극을 바라보며 평화적 이용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일본의 북극정책’이라는 종합 대책을 통해 “북극의 안전 보장을 둘러싼 움직임에 깊이 주시하며 법의 지배 확보와 평화롭고 질서 있는 형태의 국제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2020년까지 북극 관측선을 제작해 북극 과학 연구의 중심이 되겠다는 계획이다. 그밖에 그린란드 투자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등 일본 민간자본의 북극권 투자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는 큰 그림 속에서 북극을 주목하고 있다. 2013년 북극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했고 지난해 시행계획을 확정했다. 러시아와 북극 항로 개발협력 확대를 모색하는 한편 21개 연구기관이 합동으로 ‘북극 연구 컨소시엄’을 발족시켰다.


누크·일루리사트(그린란드)=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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