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화학물질 4만 개 중 독성 파악 15%뿐…“중독센터 만들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십수년간 가습기 살균제가 제조돼 시장에서 버젓이 판매되는 동안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관 부처인 환경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 등은 눈 뜨고도 인체에 치명적인 독성물질을 걸러내지 못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솜방망이 처벌로 화를 키웠다.

위험성 몰랐다는 정부
등록물질 990종 외 공개 의무 없어
제품 안전성 여부 시장에 맡긴 셈

가습기 살균제에 유해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이 사용된 건 2001년부터다. 환경부는 당시 해당 성분의 위험성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안전하다’는 기업의 말만 믿고 유해성분이 포함된 제품의 생산을 허가한 것이다.

2011년 중증폐렴으로 임산부 7명이 한꺼번에 입원하고 4명이 사망하자 보건부와 질병관리본부가 뒤늦게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그해 11월 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가습기 살균제는 계속 판매됐다.

정부가 PHMG를 유해화학물질관리법상 유독물로 지정한 건 2012년 9월. 2011년 4월부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자 등 피해자가 속출한 지 1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었다. 산업부 관계자는 "욕실세정제나 유리세정제는 산업부가(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 샴푸나 마디샴푸 등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화장품법), 식기와 과일세척제 등은 복지부가(공중위생법), 콘텍트렌즈 세정제나 구강세정제는 식약처가(약사법) 관리한다"며 "가습기 살균제는 당시 어느 부처 소관도 아니라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가습기살균제를 의약외품으로 지정해 식약처 산하 관리품목으로 지정한 것은 사건이 불거진 후인 2011년 12월30일이다.

가해 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에 과징금 5100만원, 홈플러스에는 100만원을 부과하고 롯데마트에는 경고 조치만 한 공정거래위도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가습기 살균제에 들어 있던 유해 성분 외에도 우리가 사용하는 생활용품에 유해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떤 화학물질이 인체에 유해한지 규명되지 않은 게 부지기수다.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김성균 교수는 “국내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 4만3000여 종 중 환경부에서 독성을 파악한 것은 6600여 종(15%)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나머지 3만6400여 종에 대한 독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언제든 제2의 가습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생활용품 유독물질에 대한 정보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현행 ‘화학물질 등록·평가법’상 이 법에 적시된 유독물질 870종과 발암물질 120종 외에는 기업이 생산 제품에 어떤 화학물질을 썼는지 환경부에 신고하거나 공개할 의무가 없다. 제품의 유해성을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기업이 모르쇠로 일관하면 정부와 소비자는 당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살생물제(Biocide·생명파괴제) 관리부처가 제각각으로 나뉘어 있어 대응력은 더 떨어진다. 일본의 소비자청과 같이 생활용품 안전을 전담하는 부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기사 
① “세균 죽일 정도면 사람에게 나쁠 텐데…병원도 몰랐다”
② “애 살리려 가습기 더 틀었는데…”
③ [가습기 살균제 리포트] 사진으로 읽는 피해자 109명 인터뷰



중독센터 등 국가와 병원을 연계해 관리하는 시스템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식품·농약·생활용품을 막론하고 비슷한 증상이 4~5건만 나타나면 원인을 초기에 밝혀내 제품을 판매 금지시키는 형태다. 박동욱 방송통신대 교수는 “세계보건기구(WHO) 가입국의 47%가 중독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미국에만 56개가 있다”며 “중독센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채윤경·정진우·윤정민·송승환 기자 pcha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