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업 제조에 공 들이는 기업] ‘기업 제조’ 전략으로 알파고 창조한 구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글로벌 기업들이 제품 제조뿐만 아니라 기업 제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제품·서비스를 직접 생산하는 대신, 핵심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초기 기업을 키우거나 인수해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자체 역량만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 발전의 속도와 환경 변화가 빠르기 때문이다. 저비용·혁신 창업이 늘어난 점도 ‘기업 제조’의 배경 중 하나다. 국내 기업들도 벤처·스타트업 인수와 투자를 늘리고 있다. 다만, 기업의 기업 육성 역량과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보완책이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사 이미지

올 상반기 국내외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가장 큰 화제는 이세돌 구단과 구글의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의 바둑 대국이었다. AI의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었던 대국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다섯 번의 대국을 끝내고 구글은 AI 분야의 주도권을 확실히 다지며 글로벌 ICT 업계의 ‘넘버 원’은 구글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다시 한번 알렸다. 이 대결이 끝나고 구글의 시가총액은 58조원 이상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자체 R&D만으로는 변화 따라잡기 어려워 ... 대기업-스타트업 윈윈 전략

그러나 엄밀히 말해 구글은 알파고를 개발하지 않았다. 알파고의 개발 업체를 인수했을 뿐이다. 구글은 2014년 당시 설립된 지 3년이 조금 넘은 AI 개발회사 딥마인드 테크놀로지를 5억 달러(약 7000억원)에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 시켰다. 혁신 기술을 바탕으로 검색엔진 등을 직접 개발하던 구글이 이제는 혁신 초기 기업 육성을 통해 실적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구글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같은 전략을 준비해왔다. 지난해 8월 ‘알파벳’이라는 이름의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실제 사업은 구글과 구글X·라이프사이언스·네스트 등 자회사에게 맡긴다고 발표했다.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제품·서비스를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손발이 돼줄 기업을 육성하거나 인수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구글은 특정 사업에 의존하지 않고 사업 영역을 무인자동차·로봇·드론·생명과학·우주사업 등으로 무한 확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구글의 발 빠른 전략 선회

기사 이미지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를 마치고 이세돌 9단과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 데미스 하사비스 CEO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올해 4월에는 회사 내부에서 스타트업 발굴을 위한 인큐베이터 조직을 직접 가동한다고 밝혔다. ‘에어리어 120’으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내부 직원이나 팀이 가진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이다. 구글이 기술과 자금 지원을 맡아 투자자로 참여하는 형태다. 구글벤처스 통한 초기 기업 투자, 구글캐피탈을 통한 후기 기업 투자, 사내 인큐베이팅까지 일찌감치 다른 초기 기업을 육성할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기업이 제품을 만들지 않고 기업을 만드는 ‘기업 제조’의 시대가 도래했다. 제품과 서비스를 직접 개발하고 만들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관련 기술을 갖고 있는 벤처·스타트업을 찾아 투자하는 트렌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컴퍼니 빌딩’ 또는 ‘기업 벤처링’과 유사한 전략이다. 지금은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는 상태에서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업체를 찾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면서 기업 제조에 집중하는 글로벌 기업이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텔은 1991년에 인텔캐피털이라는 투자 전문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최대의 이륜 전동식 이동장치 업체 나인봇 등 지금까지 800여 곳에 투자했다. 지난해 4월에는 중국 하드웨어 업계를 겨냥한 1억 달러(약 1173억원) 규모의 펀드를 따로 만들었다. 퀄컴 역시 드론 업체 3D로보틱스, 헬스케어 스타트업 눔 등에 투자한 바 있다.

기계·유통·자동차·화학 업체도 기업 제조

기사 이미지

기업 제조가 IT기업의 전유물은 아니다. 최근에는 글로벌 기업의 기업 제조가 업종을 불문하고 확대되는 양상이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벤처캐피털 자회사를 설립한 대기업들은 대부분 IT기업이었지만 금융위기 이후에는 기계(보쉬), 유통(홈디포), 자동차(GM·BMW), 엔지니어링(빌핑거), 화학(에보닉) 등 전통산업의 대기업들도 본격적으로 기업 제조에 뛰어들고 있다.

일례로 미국 유통업체 홈디포는 2012년부터 전자상거래 강화를 위해 소비자 친화적인 소프트웨어를 서비스에 적용할 목적으로 2010년 창업한 신생 소프트웨어 벤처회사 블랙로커스를 인수했다. 마스터카드는 2013년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에게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고 신규 고객을 발굴하기 위해 빅데이타 분석 업체인 뮤시그마에 투자했다. 스타벅스는 2012년 결제서비스 업체인 스퀘어에 2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자동차 업체 역시 벤처의 산실인 실리콘밸리에서 미래 신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중국 자동차 회사 상하이자동차(SAIC) 계열의 사익(SAIC)캐피털은 2014년 12월 1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인공지능, 음성 인식기술 전문 업체 등 5곳의 미국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현대자동차의 중국 내 합작파트너인 베이징자동차도 지난해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를 시작했다. 현대차와 미국 GM, 일본 도요타·혼다자동차도 투자할 벤처기업을 물색 중이다.

제품·기업·산업의 수명 짧아져

기사 이미지

구글처럼 기존 사업보다 기업 제조에 더 힘을 싣는 곳도 늘고 있다. 소프트뱅크가 대표적이다. 일본 IT 기업 소프트뱅크는 올 초 중간 지주회사를 설립해 해외 사업과 국내 사업을 분리했다. 소프트뱅크의 해외 사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진행한 고성장 인터넷 기업 투자가 핵심이다. 중국 최대 온라인 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와 미국 통신업체 스프린트가 그 결과물이다. 소프트뱅크는 사업 분리를 통해 향후 전세계 고성장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에 힘을 실을 전망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별도의 수익 사업 없이 아이디어와 팀에 투자하고 대가로 지분을 획득하는 방식의 새로운 개념의 인큐베이팅 사업모델도 등장했다. 2005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설립된 Y콤비네이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본만 투자하는 전통적인 벤처캐피털과는 달리 스타트업을 시작 단계부터 직접 관리·육성한다. 대신 5~10%의 지분을 인수해 스타트업이 성장했을 때 상장이나 M&A를 통해 수익을 챙긴다.

이에 따라 기업이 설립한 벤처투자사(CVC)를 포함한 기업의 스타트업 투자 규모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국 내 CVC의 투자 규모는 2011년 27억7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24억6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북미와 유럽도 각각 2011년 136억9000만 달러와 14억5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341억 달러와 73억4000만 달러로 CVC 투자가 확대됐다. 기업의 자체적인 스타트업 투자까지 포함하면 기업이 관여하는 스타트업 투자 규모는 지난해 기준 전체 스타트업 투자의 23%로 확대됐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들의 기업 제조가 활발해진 것은 산업 트렌드가 너무 빨리 변하고 이종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전통 모델로는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워서다. 과거엔 점진적 혁신으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이제는 플랫폼 기술 등이 바뀌면서 붕괴와 창조가 동시다발로 이뤄지고 있다. 그만큼 제품·기업·산업의 수명이 짧아졌다. 미국 경영전략가인 래리 다운스는 이를 ‘빅뱅 디스럽션 시대’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영역의 제품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면서 제품과 기업의 수명이 현격히 단축됐다는 것이다. 그만큼 창조와 속도가 중요하다. 김양민 서강대 교수는 “20세기 산업화 시대엔 GM·월마트 등 대기업의 수직계열화와 규모의 경제가 핵심 자산이었지만 미래엔 오히려 조직을 굼뜨게 만드는 부채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현상은 IT 같은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 융합에 대한 기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미래 시장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발생하고 있다. IT와 결합한 혁신적인 제품과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고 신흥국이 급부상하면서 기업 생태계가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다. 실제로 자율주행차·전기차·O2O·핀테크의 등장으로 전통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개발을 통해 따라가려고 했다가는 기술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해당 분야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조시 러너 교수는 “기업 자체의 연구개발(R&D) 성과에만 의존했다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기 어렵다”며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스타트업 투자”라고 설명했다.

창업이 쉬워지면서 투자할 만한 스타트업이 늘어난 것도 기업 제조 활성화에 영향을 미쳤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2000년대와 달리 개발자들이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데 있어 오픈 소스를 이용해 코딩 작업도 쉬워졌다”며 “개발한 서비스를 유통시키는 비용도 줄어들고 글로벌 시장 진출도 용이해져 스타트업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기업 입장에선 혁신 창업기업을 잘 골라 투자만 해도 되는 환경인 셈이다. 또 일정 궤도에 오른 다양한 기술이 서로 융합되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릴 가능성도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감으로 많은 글로벌 기업이 의지를 갖고 벤처투자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기업 제조는 대기업과 스타트업에게 ‘윈윈’이 될 수 있는 전략이다. 대기업에게는 외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핵심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효과적인 R&D 전략이다. 이를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늘릴 수도,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노릴 수도 있다. 또한 이미 성장한 기업을 인수하는 일반적인 M&A에 비해 ‘승자의 저주’나 ‘좀비기업’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만큼 인수 후 주력 부문의 현금흐름을 크게 훼손시킬 정도의 비용 부담이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반 M&A에 비해 위험부담 적어

벤처 업계 역시 대기업들의 투자 확대를 환영한다.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대기업으로부터 자금을 투자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품 및 소재공급 업체 등을 소개받을 수 있고, 은행 등 다양한 거래 업체나 사업파트너와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히 정보통신, 에너지 및 의료 등 벤처창업이 활발한 분야는 해외 시장 진출이 중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대기업은 정부보다 훨씬 용이하게 해외 시장 진입의 판로를 공유해 줄 수 있다. 또 프로그램 개발자 출신이 초기 경영진을 이루는 대다수 벤처기업이 생존하기 위한 경영 컨설팅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최근 국내 기업도 기업 제조에 가세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혁신센터(GIC)·삼성전략혁신센터(SSIC) 등 실리콘밸리의 투자 전문 조직을 통해 스마트카·전자결제·가상현실 등 미래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 조직이 스타트업 기업 발굴과 인큐베이팅을 담당하고 벤처의 기술을 자사 제품에 활용하는 전략이다. 카카오는 자체 투자 전문 회사인 케이큐브벤처스·케이벤처그룹을 통해 여러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여기서 발굴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카카오 플랫폼에 적용해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교보생명이 라이프플래닛이라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롯데·GS홈쇼핑 등 유통 업계는 주로 모바일커머스·가상현실(VR)·핀테크·O2O 등 미래 상거래에 적용 가능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보유한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게임 업계에서는 넷마블·네시삼십삼분·컴투스·데브시스터즈 등이 자체 투자 전문 회사를 통해 중소 게임사 투자·인수에 나서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패스트트랙아시아·옐로모바일·500V 같이 국내에도 기업 육성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도 등장했다.

함승민 기자 sham@joongang.co.kr

기사 이미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