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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이어 구의역도 ‘포스트잇 추모’…2030이 움직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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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비정규직 죽음 ‘구의역 추모’ 서울 지하철 구의역 플랫폼에서 31일 한 여성이 스크린도어에 붙어 있는 쪽지를 보며 추모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달 28일 19세의 서울메트로 용역업체 비정규직 직원 김모씨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달려오는 전동차를 피하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쪽지에는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과 저임금 근로자의 애환 등이 담겨 있었다. [사진 오상민 기자]

31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와 역무실 옆 추모 공간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400여 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난달 28일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가 숨진 정비용역업체 직원 김모(19)씨를 추모하는 글귀들이 보였다.

‘같은 비정규직 근로자로서 가슴 아픕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행복하세요’ ‘불의의 사고가 아니다. 죽도록 노력해도 청년들이 죽음으로 몰리는 사회’.

| 여성·비정규직·사건·사고에 공감
20대 알바생 “내 문제 같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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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현장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 추모객들이 햇반과 봉지김치, 생수 등을 가져다 놓았다. [사진 오상민 기자]

포스트잇 중 200여 장에는 희생자를 애도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청년들의 울분이 담긴 100여 장,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글귀가 적힌 100여 장이 나머지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여대생 살인사건 때부터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까지 ‘포스트잇 추모’가 젊은 층의 문화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인터넷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울타리를 벗어난 현실 공간에서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는 일종의 시민문화다.

포스트잇 추모는 여성, 비정규직 근로자 등 사회적 약자가 희생된 사건·사고에서 비롯됐다. 그래서인지 추모 행렬에 참여한 시민은 대부분 여성이나 20~30대 젊은 층이었다. 지난달 30일 구의역을 찾은 대학생 이영모(26)씨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고 있다.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청춘을 마감한 김씨의 사연에 공감해 추모하러 왔다”고 말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포스트잇 추모에 참여했던 서민지(20)씨는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불안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여성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에 적극 참여했다”고 했다.

| “2030 마이너리티 억눌린 불안감
SNS 뛰쳐나와 현실 공간서 표출”

이전까지 인터넷 공간에서 ‘흙수저론(부모의 재력에 따라 계급을 나누는 자괴적 표현)’ ‘헬조선(한국을 지옥에 빗댄 자조적 표현)’ 등 자조적인 목소리를 되풀이해 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마이너리티(minority)’들의 공감과 불안, 울분이 포스트잇을 매개로 현실 공간에서 극적으로 표출됐다고 분석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냉혹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청년들은 두 사건을 ‘나 역시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일’로 인식했다”며 “불안과 불만의 감정들이 정서적이고 직관적인 ‘포스트잇’ 추모로 나타났다”고 해석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마이너리티 세대의 공감이 강남역 사건에선 여성에게, 구의역 사고에선 비정규직 청년에게 투영됐다”고 말했다.

| 숨진 김군, 사고 다음날이 생일
월급 144만원 받아 100만원 적금

이날 오전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김씨의 어머니는 민주노총이 주최한 기자회견에 참석해 “아들이 끼니를 거르고 내색도 못하며 직장을 다녔는데 규정을 어겼다고 책임을 돌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이어 “적은 월급을 쪼개 지난 1월부터 한 달에 100만원씩 적금을 다섯 번 부었다. (우리 사회에선)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지내면 죽음뿐인데 애를 그렇게 키운 게 미칠 듯이 후회된다”며 오열했다. 또 “사고가 난 다음 날이 우리 아이 생일이다 ” 고 했다. 김씨가 용역업체로부터 받은 월급은 144만원 수준이었다. 해당 용역업체는 서울메트로에서 지난 5년간 300억원대의 용역비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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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울메트로는 2인 1조 근무 매뉴얼이 있음에도 작업자가 2명이 왔는지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사고 당일 홀로 작업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서울시는 지하철 안전 업무와 관련한 외주를 중단하고 산하기관들의 외주 업무를 전면 개선하겠다고 31일 밝혔다.

이날 구의역 사고 현장을 찾은 박원순 서울시장은 “사고 원인에 대해 철저히 진상 규명하고 관련자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메트로는 기존 입장을 번복해 “사고의 원인은 고인의 잘못이 아닌 관리와 시스템의 문제가 주된 원인”이라고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글=손국희·김나한·백민경 기자 9key@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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