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투표 한달 앞, 베르됭서 손잡은 메르켈·올랑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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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22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오른쪽)가 프랑스 동북부 베르됭의 두오몽 납골당 앞에서 열린 프랑스·독일 화해 기념식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베르됭 AP=뉴시스]

1984년 9월 22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프랑스 베르됭(Verdun)의 두오몽 납골당 앞에서 손을 맞잡았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로 목숨을 잃은 30만 명의 프랑스·독일군을 기리는 첫 추모 기념식이 열린 자리였다. 이곳에서 두 정상의 악수는 양국 화해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됐다. 국경 통제를 폐지하고 자유 통행을 보장한 솅겐협정이 합의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메르켈 “국수주의는 유럽 후퇴”
올랑드 “분열 땐 역사의 폭풍우”
32년 전 콜·미테랑 악수한 그 곳
베르됭 전투 양국 전사자 납골당서
흔들리는 EU 추스리기 힘 모아

베르됭 전투 100주년을 맞은 29일(현지시간) 베르됭 두오몽 납골당에서 1984년 때처럼 프랑수와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나란히 섰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양국이 더할 나위 없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만큼 두 정상은 이날 ‘화해와 평화’라는 기념식의 의미를 유럽 통합에 십분 활용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기념식 연설에서 “유럽은 지금 분열 위기에 당면해 있다”며 “이곳 베르됭에서 엄숙한 의무는 서로 사랑하며 유럽이라는 공동의 집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지 못하면 역사의 폭풍우에 다시금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도 뒤이은 연설에서 유럽 통합을 역설했다. 그는 “현재 유럽이 당면한 위기는 함께 극복해야 한다. 국수주의적 사고와 행동은 유럽을 후퇴시킬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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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현지시간) 1차 대전 최대 사상자를 낸 베르됭 전투 100주년 추모 행사가 열린 프랑스 베르됭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포옹하고 있다. [베르됭 AP=뉴시스]

이날 올랑드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가 전달한 메시지는 ‘하나의 유럽’이다. 로이터통신은 “한달 뒤 영국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가 예정돼 있고, 난민 유입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잇따른 테러 등으로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유럽이 쪼개질 판에 프랑스와 독일 정상이 유럽 통합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기념식은 이른 아침 올랑드 대통령이 베르됭 독일군 묘지에서 메르켈 총리를 맞는 것으로 시작했다. 빗 속에서 두 정상은 함께 우산을 쓴 채 묘지 사이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주 일본에서 개최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나란히 참석한 올랑드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는 귀국 뒤에도 베르됭 일정을 함께 하게 됐다.

이날 오전 베르됭 시청사에서 열린 행사에선 양국 우호에 초점이 맞춰졌다. 올랑드 대통령은 “베르됭은 양국에 고통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우호와 평화가 시작된 희망의 장소”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과거를 아는 사람만이 교훈을 얻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베르됭의 기억을 깨어있도록 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베르됭 전투는 1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전투로 기록됐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1916년 2월21일 프랑스 동북부 관문인 베르됭에서 맞붙었다. 전투는 12월15일까지 10개월 간 지속됐다. 프랑스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최장기 전투였던 만큼 양국의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프랑스군 16만3000명, 독일군 14만3000명이 각각 전사했으며 수십만 명이 부상했다. 당시 6000만 발의 포탄이 전장에 떨어졌으며 이 중 4분의 1가량은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 폭발 위험 때문에 베르됭에서는 아직도 건물 신축과 농사가 금지돼 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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