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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다이빙벨 편향된 영화 맞다, 그래도 상영했어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미스터 킴(Mr.Kim)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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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은 “부산영화제는 문화 불모지 부산에서 기적적으로 일궈 낸, 세계적 문화자산”이라며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독립성을 지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달 11~22일 프랑스에서 열린 칸국제영화제에서 각국 영화제 관계자들 사이에 발 빠르게 퍼져 나간 ‘굿 뉴스’다. 흔하디흔한 ‘미스터 킴’이란 호칭은 세계 영화인들 사이에 한국 영화계의 대부 김동호(79) 부산국제영화제(BIFF·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조직위원장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된 지 오래다. 그가 부산영화제에 돌아왔단 소식은 ‘올해 부산영화제가 과연 열릴까’란 회의를 ‘틀림없이 열린다’는 확신으로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그는 24일 부산영화제 임시총회에서 첫 민간인 조직위원장에 취임했다. 1996년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만든 부산영화제를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성장시킨 김 위원장은 2010년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2014년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의 상영을 둘러싸고 촉발된 영화제와 부산시의 갈등이 영화제 존폐 위기로까지 치닫자 위기를 타개할 구원투수로 영화제에 복귀했다. 23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 부산영화제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그는 “10월 영화제 개막까지 4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할 일이 정말 많다”며 말문을 뗐다.

| 대단한 영화 아닌데 부산시 ‘오버’
지원하되 간섭 않는다 원칙 지켜야

칸영화제에서 해외 영화인들의 반응은 어떻던가.
“영화제 컴백을 축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올해 영화제는 틀림없이 개최되니까, 많이들 와달라고 했다.”
고심 끝에 조직위원장을 수락했는데.
“나 또한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조직위원장을 맡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영화제 전까지는 사태 해결의 접점을 찾고, 올해 영화제를 꼭 열어야겠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
부산영화제 사태의 발단은 무엇이라고 보나.
“영화제가 ‘다이빙벨’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부산시가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을 물러나게 한 것이다. 지난 20년간 특정 영화를 틀지 말라는, 이런저런 압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대화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외압에 상관없이 영화를 틀어 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일은 지나친 것이었다. 부산시가 ‘오버’했다.”
당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당연히 틀라고 했겠지. ‘다이빙벨’을 먼저 봤는데, 그리 대단한 영화도 아니었다. 한쪽 의견에 치우친 편향적 다큐였다. 하지만 어느 편에 서 있든 간에 다큐로서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영화를 선정하고 상영하는 건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장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조직위원장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겠다.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 가야 한다.”
부산시와 영화제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다.
“더구나 문화융성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고통스러웠다. ‘다이빙벨’을 틀도록 놔두는 게 최상책이라고 서병수 시장에게 얘기했고, 부산시가 감사 결과를 근거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사표를 받겠다고 할 때도 반대했다. 하지만 부산시 입장이 워낙 강경했다. 부산시가 ‘김동호 조직위원장’ 카드를 처음에 탐탁지 않아 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민간인 조직위원장의 취임은 어떤 의미인가.
“부산시장이 당연직으로 해오던 조직위원장을 민간인이 맡게 되면 시의 간섭을 받을 여지가 없어진다. 이것만 해도 절반 이상은 얻은 거다. 아직 부산영화제 보이콧 결정을 철회하지 않은 영화인들을 만나 설득하고 동참을 유도하는 게 급선무다. 영화제의 큰 스폰서들도 만나 협조를 구할 생각이다.”
일부 영화인은 영화제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내용의 정관 개정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올해 영화제를 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관 개정부터 해야 한다는 게 이용관 전 위원장의 견해인데, 나는 달리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영화제는 개최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다. 영화계의 의견을 수렴해 정관 개정을 하겠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진 않는다. 정관에 독립성·자율성을 넣는다 해도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다. 표현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해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정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집행위원장이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좌편향 영화, 우편향 영화 가리지 않고 어떤 영화든 틀 수 있는 소신을 갖고 있으면 된다. 사람이 중요하지 정관이 중요한 게 아니다.”

|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것 절감
보이콧 영화인 설득, 영화제 꼭 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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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일정이 시간 단위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김동호 위원장의 수첩.

영화제 집행위도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당연하다. 지금 영화제는 성장통을 앓고 있다. 율곡 이이는 수성(守成)이 너무 오래되면 부패하기 때문에 경장(更張·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부산영화제가 그런 단계다. 이번 사태를 통해 창업(創業)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걸 느꼈다. 초심으로 돌아가 조직과 운영, 모든 면에서 혁신해 나갈 생각이다. 안 그러면 아시아 최고 영화제란 타이틀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와 영화인을 발굴·지원한다는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한다.”

 
김 위원장은 61년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직원으로 출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 등 문화행정 전반을 두루 거치며 영향력 있는 영화인이 됐다. 그는 “내게 찾아온 우연한 기회들을 소중히 여기며 달려왔더니, 영화가 제2의 인생이 돼 있었다”고 했다.

그는 사람 사귀길 좋아하는 온화하고 소탈한 성품이지만 원칙과 신념을 위해 결벽스러우리만큼 꼿꼿한 면도 있다. 공연윤리위원장 시절, 영화 ‘크라잉게임’의 성기 노출을 허용하고, 소련 영화란 이유로 상영이 금지됐던 ‘전함 포템킨’의 심의를 통과시켜 주는 등 관(官)보다는 제작자 입장을 대변하다 윗선의 압력을 받고 스스로 물러난 게 대표적인 예다.

| 월급봉투 집에 한 번도 안 갖다줘
불평 않는 약사 아내에 늘 고마워
2006년 금주선언 뒤 한 잔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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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의 습관이다. 덕분에 그는 오래된 일도 또렷이 기억해 낸다. 김 위원장은 운동화를즐겨 신는다.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는 신념 아래 발로 뛰며 사람들을 만난다.

어떻게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됐나.
“61년 대학(서울대 법대)을 졸업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지원하려 했는데, 졸업예정자는 응시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모집한 문화공보부에 들어갔다. 만약 그때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들어갔다면 아마 중앙정보부에서 일했겠지. 문화공보부에서 26년간 일하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물러나야 했다. 마침 산하기관인 영화진흥공사 사장 자리가 비어서 그곳에 갔다.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이후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2년 한 뒤 놀고 있을 때 부산영화제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다들 말렸지만 오기로 밀고 나갔다. 그런 우연들이 내 인생 행보를 계속 바꿔놓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월급봉투를 한 번도 집에 가져다준 적이 없다던데, 부인의 불만은 없었나.
“아내가 오래전부터 약국을 하고 있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다. 월급은 사람들 만나는 데 다 써버린다. 바깥 활동을 적극 지원해 준 아내에게 늘 감사하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를 위해 해외에서도 항상 오전 6시에 모닝콜을 해준다.”
식당에 가면 ‘접대’를 안 받으려고 신용카드를 카운터에 미리 맡겨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30년 넘게 공직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원칙이다. 원성을 들을 때도 많지만 남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다. 선물도 아파트 경비실에 부탁해 돌려보낸다.”
영화제 사무실에서 대학 강의 자료 복사를 할 때 A4 용지를 직접 사 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영화제 돈을 사적으로 쓸 수는 없지 않나. 지난해부터는 영화제에 부담을 주기 싫어 칸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도 자비로 간다. 한 해 평균 20번 정도 해외에 나가는데 늘 비행기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한다.”
해외에 갈 때 항상 빨랫비누를 챙겨 간다고.
“속옷과 양말은 내가 빨아야지, 누구에게 맡기겠나. 어디에 있든지 새벽에 일어나 일기를 쓰고, 운동하고, 빨래를 한 뒤 아침 식사를 한다.”
2006년 첫날 금주 선언을 한 이후 술 한 잔도 입에 댄 적이 없다던데.
“맹세코 없다. 그전에는 부산영화제를 술로 성공시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이 마셨다. 하지만 일흔이 되고, 영화제도 궤도에 오르면서 술을 딱 끊었다. 술자리는 여전히 즐긴다.”

| 정우성 몰라보고 영어 인사 실수도
이 자리 그만두면 장편영화 만들 것
강수연 칸 레드카펫 세우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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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부산영화제 파티에서 프랑스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왼쪽)와 춤을 추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

부산영화제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10년 프랑스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가 나의 집행위원장 퇴임을 축하해 주러 부산 영화제에 왔다. 그러곤 파티에 참석해 ‘배우가 아닌 댄서로서 미스터 킴과 춤추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며 춤을 추더라. 나 또한 막춤으로 화답하며 유쾌한 자리를 만들었다.”
영화제 심사위원들 간의 갈등을 유쾌하게 그린 단편영화 ‘주리’(2013)로 감독 데뷔를 했다. 차기작 계획은 있나.
“영화제 자원봉사자들 얘기로 두 번째 단편을 만들려 했는데 문화융성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무산됐다. 조직위원장을 그만두면 다시 감독을 할 생각이다. 딸처럼 아끼는 배우 강수연(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장편영화에 출연시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게 하는 게 목표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찾고 있다. 다음 생에선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맥 관리에 철저하다는 평이다.
“유명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스가 수술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에 병문안을 다녀왔고, 췌장암 투병 중인 네덜란드 언론인을 만나기 위해 아이슬란드 영화제에 가는 길에 암스테르담을 들르기도 했다. 인간관계를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부산영화제를 만든 게 첫 번째다. 문화행정가로 일하며 예술의전당·독립기념관·국립현대미술관·국악당·종합촬영소 등 문화 기간시설을 만든 것도 큰 보람이다. 공무원 퇴임 후 산하단체에 가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새로운 분야에서 무언가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꿈을 이뤘다. 나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다. 여든이 돼서도 계속 새로운 일을 하지 않나.”
요즘도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니나.
“그렇다. 팝콘 사 들고, 두세 편 연속으로 보기도 한다. 임흥순 감독의 다큐 ‘위로공단’을 보고 감동받아 소극장 좌석을 모두 산 뒤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해 보여주기도 했다. (올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촉망받는 캐나다의 20대 감독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부산영화제에서 배우 정우성을 몰라보고 영어로 인사말을 건넨 일화가 있는데.
“지금도 실수할 때가 많다. 이상하게도 배우들 얼굴은 잘 기억 못한다. 큰 결점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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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은

1961년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영화진흥공사 사장, 예술의전당 사장, 문화부 차관,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96년부터 2010년까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장, 동대문 미래창조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다. 임권택(80) 감독과 막역한 사이다. 자신의 감독 데뷔작 ‘주리’에 임 감독을 카메오로 출연시키기도 했다.

글=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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