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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디테일의 재발견] 새빨간 19금 영화, 그 이상의 에로티시즘…로뽀클래식 필름 페스티벌과 일본 로망 포르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본 영화 산업이 위기를 맞은 1970년대. 일본 영화 시장을 지배한 장르는 바로 로망 포르노(Roman Porno)였다. ‘그래 봤자 포르노 아냐?’라고 수상쩍은 시선을 보내는 당신, 선입견을 거두시라. 로망 포르노, 줄여서 ‘로뽀’는 이래 봬도 신선한 스토리와 독특한 실험 정신이 담긴 수작들을 배출하며 무수한 거장 감독의 등용문이었으니까. 이제 슬슬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 영화제를 주목하자. 이름하야 ‘로뽀클래식 필름 페스티벌’(이하 로뽀클래식). 영화사 오렌지 옐로우 하임이 준비한 로망 포르노 영화 축제다. 60~80년대 매니어를 거느린 로뽀계의 명작 열아홉 편을 상영할 예정. 5월 19일부터 6월 22일까지 전국 5개 도시(서울·부산·대구·광주·전주)에서 관객과 만날 로뽀클래식의 모든 것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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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 `착한 자매` 스틸컷]


“로망 포르노는 일본 영화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하나의 브랜드다. 어두운 문화가 아닌 제대로 된 19금 영화를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1970년대에 유행한 핑크 바이올런스(Pinky Violence·B급 에로틱 액션 영화) 특별전도 개최할 예정이다. 내년에 더 큰 규모로 돌아올 2회 로뽀클래식도 기대하시라.”

- 오렌지 옐로우 하임 이성재 대표



‘로망 포르노’ 이전에 ‘핑크영화(Pink Film)’가 있었다. 넓게 보면 일본 에로티시즘 영화를 통칭하지만, 구체적으로 핑크영화는 1960년대 에로티시즘 장르의 한 흐름을 말한다. 당시 일본 메이저 스튜디오 중 하나인 ‘신도호’가 파산하면서, 그 스튜디오 설비를 인수한 ‘오쿠라 에이가’와 ‘신도호 에이가’가 탄생하게 된다. 이 독립 프로덕션들은 제작비 300만 엔(약 3200만원) 전후의 섹스영화를 제작했다. 여기에 밀리언 필름·칸토·니혼 시네마·월드 에이가 그리고 핑크영화의 거장 와카마츠 스튜디오 등이 합류한다. 이른바 ‘에로덕션(Eroduction·외설영화)’으로 불리던 이들이 주도한 1962~71년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핑크필름(의 첫 번째 물결)이라 칭한다.

무명의 여배우를 캐스팅해 며칠 만에 촬영을 끝내는 싸구려 영화였지만, 1965년에 이르러 제작 편수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다. 그리고 메이저 영화사가 좀처럼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영화에 목 마른 젊은이들은 핑크영화를 통해 현장을 접할 수 있었다.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벽 속의 비밀스런 일’(1965)이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으며 일본 사회는 떠들썩해졌고, 핑크영화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1970년대에 관객 수가 현저히 줄면서 메이저 스튜디오도 핑크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전통의 닛카츠가 뛰어든 것도 이때다. 달라진 건 제작비 규모. 이타모치 다카시 사장은 현대물에 700만 엔(약 7500만원), 시대극에 750만 엔(약 8000만원)의 제작비를 책정했다. 기존의 핑크영화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이었다. 원칙이 있다면 한 시간에 최소한 네 번의 섹스 장면 혹은 여성 누드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 이것만 지킨다면 감독들에게 무한한 예술적 자율권을 보장했고, 이렇게 탄생한 ‘닛카츠 로망 포르노’는 1971~88년까지 매달 서너 편의 작품을 쏟아 내며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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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잭 더 리퍼

첫 작품은 니시무라 쇼고로 감독의 ‘오후의 정사’(1971)였다(한국에서는 2014년 12월에 개봉되었다). 니시무라 감독은 아파트 단지나 미용실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자를 에로티시즘의 영역으로 끌어온 인물이다. 또한 화면 모자이크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교묘하게 앵글을 구사하는 테크니션인 동시에 리얼한 정사 묘사의 장인이었다. 이번 로뽀클래식에서는 그를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해 준 ‘착한 자매’(1982)가 상영된다. 서점 종업원과 주인집 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여기서도 니시무라 감독은 일상의 공간과 소재를 다룬다.

한편 ‘오후의 정사’는 주인공을 맡은 시라카와 카즈코의 열연으로 활기를 띠었다. 명감독들도 많지만 로망 포르노의 상업적 기틀을 마련한 것은 ‘닛카츠 퀸’ 삼인방이었고, 시라카와는 그 선두 주자였다. 이미 200여 편의 핑크영화를 경험한 그는 로망 포르노의 첫 스타였다. 로뽀클래식에서는 ‘이치조 사유리-젖은 욕망’(1972, 쿠마시로 타츠미 감독) 속 조연으로 만날 수 있다. 그는 1976년까지 닛카츠에 머물렀고 이후 메인 스트림으로 진출했다. 글래머는 아니었지만 시라카와의 고감도 연기는 베테랑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 닛카츠 퀸 미야시타 준코는 이번 영화제의 히로인이라 할 만하다. ‘은밀한 게이샤의 세계’(1972, 쿠마시로 타츠미 감독) ‘색정 암컷 시장’(1974, 타나카 노보루 감독) ‘실록 아베 사다’(1975, 타나카 노보루 감독) ‘빨간 머리 여자’(1979, 쿠마시로 타츠미 감독) 등 대표작이 대부분 상영돼 그의 퇴폐미를 한껏 드러낸다. 안타까운 건 마지막 닛카츠 퀸이었던 타니 나오미의 영화를 로뽀클래식에서 만날 수 없다는 점. 그의 영입으로 닛카츠는 ‘S&M’(Sadomasochism·사도마조히즘)이라는 서브 장르를 출범할 수 있었다. 이른바 ‘S&M 퀸’으로 불리기도 했던 타니는 그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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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아베 사다

세 여배우가 로망 포르노를 견인했다면, 카메라 뒤에는 수많은 거장이 있었다. ‘로망 포르노의 제왕’으로 일컬어지는 쿠마시로 타츠미 감독이 대표적이다. 그는 흥행 성적은 물론 평단의 호평까지 손아귀에 넣었는데, ‘이치조 사유리-젖은 욕망’은 키네마 준보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뿐 아니라 ‘은밀한 게이샤의 세계’는 영화 전문지 ‘키네마 준보’ 선정 베스트 10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영화는 비평적 논쟁점이 되기도 했다. 평단에서 무정부주의·허무주의와 에로티시즘의 뛰어난 결합으로 보았다면, 이후 ‘감각의 제국’(1976)을 만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섹스를 소재로 이용할 뿐 주제로는 승화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타나카 노보루 감독은 후세의 평론가에 의해 높이 평가됐다. 그는 확고한 철학 위에서 에로티시즘을 구현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섹스는 인간이 본성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그래서 섹스를 테마로 영화를 만드는 건, 인간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이 세상의 핵심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 중 로뽀클래식에서는 ‘창녀 고문 지옥’(1973) ‘색정 암컷 시장’ ‘실록 아베 사다’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색정 암컷 시장’은 사창가를 소재로 다룬 이른바 ‘적선물(赤線物)’의 걸작이며, 그 거친 리얼리티는 충격적이다. ‘실록 아베 사다’는 ‘감각의 제국’과 같은 소재를 영화화한 작품. 이 영화를 시작으로 ‘천장 위의 산책자’(1976) ‘미인 난무:고문!’(1977)까지 이어지는 ‘쇼와 시대 3부작’은 타나카 감독의 대표작이다.

‘바이올런트 핑크(Violent Pink)’의 개척자인 난폭한 감독 하세베 야스하루도 로망 포르노 장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초기 대표작 ‘강간’(1976) ‘폭행 잭 더 리퍼’(1976) ‘강간 25시/폭간’(1977) 중 ‘폭행 잭 더 리퍼’가 로뽀클래식에서 상영된다. 로망 포르노의 문을 연 ‘오후의 정사’ 조감독 출신 오하라 코유 감독은 가장 과소평가된 인물로 꼽히는데, ‘뒤가 참 좋아’(1981)에서 그 진면목을 확인 가능하다.

1970년대에 승승장구했던 로망 포르노는, 1980년대 AV(Adult Video)의 등장과 검열의 압박으로 힘든 시절을 겪으며 하강하게 된다. 결국 1988년 고토 다이스케 감독의 ‘베드 파트너’를 마지막으로 문을 내린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핑크의 세 기둥’으로 불리던 세 감독 나카무라 겐지, 타카하시 반메이 그리고 와타나베 마모루. 이번 로뽀클래식에서는 와타나베 감독이 1970년대에 만든 ‘롯폰기 스캔들’(1979)이 상영된다. 그 밖에 반가운 점은 1980년대 일본 뉴 웨이브를 이끈 감독들의 에로틱한 시절을 접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실락원’(1997) ‘마미야 형제’(2006) 등으로 유명한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의 ‘사랑의 이발소’(1983), ‘세일러복과 기관총’(1981)로 유명한 소마이 신지 감독의 ‘러브 호텔’(1985) 등을 만날 수 있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로뽀클래식 필름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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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5월 19일(목)~6월 22일(수)

장소
조이앤시네마(서울)
국도예술관(부산)
동성아트홀(대구)
광주극장(광주)
조이앤시네마 전주(전주)

문의 www.ropoclaxxicf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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