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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막말 정치'가 먹히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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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편도 만족을 못 시키면서 미국을 만족시키겠다고?

저 X이 보도한 것은 다 거짓말이다. 저 X은 삼류기자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공화당 후보가 된 도널드 트럼프의 ‘유명한’ 막말이다. 앞의 말은 지난해 4월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자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과거 성 스캔들을 빗대 비웃은 것이고, 뒤의 것은 지난해 12월 유세 도중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도한 방송 여기자를 가리키며 한 욕이다.

이때만 해도 그가 ‘그랜드올드파티(GOP)’라 불릴 만큼 전통 있는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코미디는 현실이 됐고, “트럼프가 후보가 되면 이 칼럼을 먹겠다”고 썼던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는 신문지로 만든 요리를 먹는 이벤트를 연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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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필리핀의 트럼프`라 불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

얼핏 어처구니없는 막말 지도자 열풍이 비단 미국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필리핀의 트럼프’라 불리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 역시 지난 7일 치러진 필리핀 대선에서 600만표 이상의 차이로 임기 6년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범죄자들의 시체를 빨랫줄에 널겠다”고 호언하던 그였다. 검사 출신으로 자경단가을 조직해 범죄 혐의자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한 이력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도 한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기도 전에 “경찰이 범인을 현장에서 사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외쳤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소란스러운 브라질에서도 아이티 여성 난민들을 향해 “씻지도 않고 몸을 파는 쓰레기”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는 자이르 볼소나루 의원이 2018년 치러질 대선의 유력한 후보다. 이들보다는 점잖지만 “오스트리아에 무슬림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외치는 극우정당의 노르베르트 호퍼 후보가 전후 최초로 오스트리아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에 올랐다.

◇'대리 배설의 포퓰리즘' 덕에 막말 정치인 득세
남북 미대륙과 유럽, 아시아 등 지구촌 전역에서 막말 정치가 먹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통 사람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험한 말을 내뱉는 정치인들이 부상하는 이유는 뭘까? 이른바 ‘대리 배설의 포퓰리즘’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진단이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주머니 사정이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대신 토로해주는 막말 정치인들에게 동조하며 대리만족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탈출구 없는 세상에서 극단적 정치인들의 언행이 시원한 청량음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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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6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만난 무솔리니(오른쪽에서 두번째)와 히틀러(오른쪽에서 세번째). 전세계에서 불고 있는 막말 정치인 열풍은 이 두 독재자에 열광하던 현상과 다르지 않다.

유권자들의 불만과 분노의 원인은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듯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양극화다. 1%의 가진 자들이 부의 99%를 독점하는 현실에 부의 1%를 쪼개야 하는 99%의 못 가진 자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1%의 가진 자 중에서도 0.01%의 슈퍼리치들이 99%의 99%를 차지하는데 나머지 0.99%의 가진 자들이 분노한다. 부는 상대적 개념인 까닭이다.

이 같은 진단은 못 가진 자들의 시샘 어린 투정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기업 사냥꾼’ 칼 아이컨조차도 “미국에서 자본가들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벌고 있으며 소득 양극화를 해소하지 않는다면 장차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양극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튼튼한 허리가 되야 할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온다. 실제로 미국의 퓨리서치센터가 229개 도심지역에서 1999년과 2014년의 소득을 분석한 결과 중산층의 가계소득이 감소한 곳이 83%에 이르렀으며 87% 지역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중산층 비중이 줄어들었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 같은 이는 “일자리의 4% 밖에 만들지 않는 100대 기업이 이익의 60%를 가져가는 승자독식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청년 실업률이 2000년 이후 4월 기준으로 가장 높은 10.9%로 치솟았고, 올 2월부터 3개월 연속 최고치(같은 달 기준)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분노한 유권자들이 막말의 대리배설 기능만 좇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양극화의 문제점을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득권 정치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누적된 실망이 ‘아웃사이더’ 정치인들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생각 없는 막말을 늘어놓더라도, 때로는 현실성 없는 과격한 주장을 하더라도, 부조리한 현실을 고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기득권 정치인들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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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 의원.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성 정치인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의 샌더스 열풍을 일으켰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함께 거센 돌풍을 일으킨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경우가 단적인 예다. 그의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아무리 대세라 여겨졌지만 그 역시 한번 강연에 수억원씩 챙기고 미국 연방선거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무제한으로 선거자금을 후원하는 수퍼팩(Super PAC)의 지원을 받는 기득권층인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유권자들에게 샌더스는 여객기 이코노미 좌석에 다른 승객들 틈에 끼어 타고, 큰손들의 기부를 거부한 채 소액의 개인기부금에만 의존하는 ‘정직한’ 정치인이다. 심지어 트럼프조차도 (스스로 돈이 많기 때문에) 돈에 매수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실제로 그는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적은 선거비용을 썼다)이 지지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주화 이후에도 필리핀의 족벌정치는 여전하고 빈부격차 역시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베니그노 아키노 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필리핀은 6%에 가까운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그 과실은 40여개 재벌가문이 독차지했다. 민주화를 이뤘다고는 하나 정치 독점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100여개 가문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직을 세습직처럼 나눠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테르테가 자신은 특권층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정치족벌과 재벌에 대한 국민 반감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 두테르테조차 다바오 시장 자리를 딸에게 물려주는 게 필리핀의 현실이다.)

우리라고 하나도 나을 게 없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기업 오너가 일가가 운영하는 회사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일감을 몰아주고도 면죄부를 받고, 오너 기업인이 폭락 직전 주식을 팔아 치우고 망해가는 회사를 국민 혈세로 살려내야 하는 상황 아닌가 말이다. 그런 부조리를 하나도 감시하지 못하고 권력 다툼만 하다 참패한 집권 여당은 선거 한 달이 지나도록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계파 싸움만 계속하고 있다.

◇막말 정치인, 양극화이 대안될까
문제는 그런 막말 정치인이 권력을 차지한다고 해서 말처럼 시원하게 양극화가 해소되고 유권자들의 분노가 사그라져 건전하고 건설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느냐는 데 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현실정치의 한계에 직면해 보다 언행에 신중해지지 않고 막말을 계속 앞세운다면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고 자칫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 이념적인 정책 대결이 아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감정적 대립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면 가뜩이나 장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글로벌 경제의 발목을 더욱 세게 붙들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트럼프가 공약대로 중국과 멕시코 상품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상할 경우 두 나라, 특히 중국도 이에 상응하는 무역보복에 나설 게 분명하다. 세계 잠재 성장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정학적 정치 리스크가 가뜩이나 허약한 경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려 자칫 글로벌 경제가 공멸할 수 있다. 필리핀의 경우 두테르테의 정책이 당장 국가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만약 그러한 경제적 위기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사회의 최약자 계층이다. 이어 위기가 확대되면서 서민층, 중산층으로까지 균열이 커질 것은 명약관화인 사실이다. 부유층은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고 일부 수퍼리치들은 그런 위기를 이용해 더욱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과거 경험에 비춰볼 때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대중이 기댈 건 혁명 뿐?
이제 대중들은 어디에 기대야 할까. 선택은 혁명밖에 없을 수 있다. 우리에게 대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막말 정치인이 없다고, 그런 포퓰리즘에 현혹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 국민 수준이 높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양극화는 이제 전지구적 현상이다. 벌어지는 속도도 점점 빨라져 그 가속도에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가 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시할 정도다. 양극화로 인한 소득 불균형의 심화가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더 문제다. 그 악마적 악순환은 세계적인 혁명 도미노로 끝나게 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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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국회의원 배지.

그 혁명의 자이로드롭에 우리가 탑승하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라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OECD가 16일 지적한 대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여성·청년·고령층의 노동시장 참여 제한 등이 사회통합과 성장 잠재력 확충을 저해하고 사회 양극화를 가속하고 있다. 고용 유연성을 확대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인건비 격차를 줄여 기업의 비정규직 고용 유인을 축소하는 동시에 사회안전망을 크게 확충해 일자리 보호에서 근로자 보호로 전환하는 것이 옳다. 또한 복지를 늘리기 위한 재원 마련 등의 논의를 위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야 한다. 개원을 앞둔 20대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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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중국일 것이다. 우선 외교적 측면에서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정권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과 달리 고립주의 정책 쪽으로 가까이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을 통해 남중국해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며 군사 개입을 늘려온 오바마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병력을 빼면 그 힘의 공백은 중국이 메울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민주주의나 인권을 거론하며 중국을 압박했던 기존 미국 정치인들과는 달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심사를 가진 트럼프가 훨씬 대하기 편할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국은 트럼프에게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트럼프는 최근 “미국 경제가 망가지면 채권국들과 채무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협상을 하게 된다면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인 중국이 1순위가 될 것이다. 협상장에서 1조2500억원이 넘는 채권을 가진 중국이 갑이 될 게 분명하다. 각종 유리한 조치를 얻어낼 수 있다. 트럼프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돈을 찍어내면 되므로 채무불이행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신뢰가 금이 가면 기축통화국 지위 자체가 위험해진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가 흔들리면 위안은 훨씬 힘을 얻게 된다.

 “트럼프의 부상은 미국이 정치 시스템에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는 중국 내부의 인식을 소개하며 “미국의 손실은 중국의 이익을 의미한다”는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의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