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잘나가던 남미 파워 여성들이 몰락한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그저 우연이기만 할까? 남미를 호령했던 여성 지도자들의 동시 추락 얘기다.

지우마 호세프(68)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12일 탄핵 심판을 받게 되면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 위기를 탈출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탄핵 심판 후 최종 결정권을 쥔 브라질 상원은 탄핵 찬성이 압도적이다.

남미의 또 다른 여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63)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지난 13일 아르헨티나 검찰에 기소됐다. 지난해 12월 물러난 지 5개월만에 법정에 서는 험악한 상황을 맞은 것이다. 혐의는 개인 비리가 아니다. 임기 마지막 몇 개월간 아르헨티나 통화인 페소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중앙은행의 보유 달러를 시장 환율보다 낮은 가격에 매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혐의가 사실이라면 대통령에게 환율 조작에 대해 죄를 묻는 것이 된다.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64) 대통령은 두 사람에 비해 사정이 낫다. 그러나 그 역시 며느리가 탈세 사건에 연루되면서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해 고전하고 있다.

5년전만 해도 이들 세 명의 여성지도자는 남미에 만개한 여성 리더십을 상징했다. ‘브라질의 대처’라는 별명을 가진 호세프는 2011년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페르난데스는 그 해 54%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해 집권 2기를 열었다. 2010년 80%가 넘는 지지율 속에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친 바첼레트는 세계 각국의 지지 속에 유엔여성기구 총재가 됐다.

5년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뉴욕타임스(NYT)는 15일 이들의 정치적 쇠락을 전하면서 남미 정치권의 ‘마초(남성 우월주의)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의 저명 정치 해설가인 세르지오 베렌츠타인은 “변화에 저항하는 강력한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남미는 여성 정치인 활약이 유럽 못지 않은 곳이다. 국회의원 4명 중 1명이 여성이다. 공직 후보자의 30~50%를 여성에게 의무적으로 배정하는 할당제도(쿼터시스템)를 채택한 나라가 16개국이나 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제도적 혁신도 남미의 정치ㆍ사회에 뿌리깊은 남성위주 문화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오클라호마주립대 파리다 잘랄자이 교수는 “남성들이 일삼아온 부패에 대한 모든 반발을 여성 지도자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며 “배후에 성(性) 역학이 없다면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까. 브라질에선 호세프 대통령이 직무에서 물러나자마자 여성의 정치 참여 시계가 거꾸로 도는 일이 발생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 미셰우 테메르(75) 부통령이 출범시킨 새 내각에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을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브라질ㆍ아르헨티나ㆍ칠레의 전·현직 여성 지도자에겐 좌파라는 공통점도 있다. 공교롭게도 남미 좌파정권의 위기가 여성 지도자들의 쇠퇴와 겹친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몰락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남미 국가들을 강타한 경제난이다.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우 중국의 경기 둔화에서 비롯된 글로벌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석유ㆍ철광석ㆍ구리 등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면서 브라질 경제는 지난해 마이너스 3.8% 성장이라는 25년만에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아르헨티나는 페르난데스 대통령 집권 후반 성장률이 0%로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은 30%대로 치솟았다. 임기 말에는 ‘기술적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면서 국제금융시장에서 외면 받기도 했다. 이런 악재 속에 페르난데스가 추구했던 포퓰리즘도 한계에 부딪쳤다.

민심은 변덕스럽다. 개혁과 변화에 열광하지만 성과가 없으면 돌아선다. 더욱이 경제 파탄에는 가차 없이 등을 돌린다. 남미 여성 지도자들의 불운도 그 철칙을 보여주는 듯 하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