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서양인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비법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6.05.14 06:00

업데이트 2016.05.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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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보다는 팝송이 왠지 있어 보여 좋았다. 그래서 중학생 때부터 이어폰을 끼고 살았다. 한 가지 말 못할 아픔은 가사를 모른다는 거였다. 하는 수 없이 영어 사전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단어 몇 개만으로도 그럭저럭 가사의 뜻을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팝송의 묵직한 가사, 예를 들면 ‘이제 그만 정신차려(why don’t you come to your sens es)’(이글스의 데스페라도 첫 소절) 같은 말을 이해하려면 결국 문법에까지 손을 대야만 했다. 그렇게 필자의 독해 능력은 무르익었고, 지금도 필자가 기억하는 영어 단어의 절반쯤은 팝송 가사에서 나온 것이지 싶다.

l 한자 200자 정도만 알아도 일상생활 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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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학당의 외국인 학습자들이 지난해 10월 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 무대에서 각 나라 전통 의상을 입고 한글날 축하 번개모임을 하고 있다.

샤오란은 단 5분 만에 수십 개의 한자를 서양인들의 머리 속에 각인시킨다. 그녀의 독특한 한자 교습법 덕분이다. 이런 식이다. 입을 벌릴 수 있는 만큼 크게 벌려 네모 모양이 되면 그것이 한자의 입(口)이 된다. 사람이 걷는 모습을 본뜬 글자가 사람(人)이다. 만약 사람 두 팔에 불이 붙으면 화급하게 ‘불이야’하고 소리칠 텐데, 그걸 흉내 내어 만든 글자가 불(火)이다. 나무처럼 생긴 글자는 바로 나무(木)이고, 산처럼 생긴 글자는 모양 그대로 산(山)이다. 해(日)와 달(月)도 생긴 모양을 흉내 내서 만들어졌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술집 문짝처럼 생긴 것은 문(門)이다.

한국의 대표 상품은 한글 ... 한글 확산 통한 국가브랜드 제고와 파급효과 기대

순식간에 한자 8개를 설명했다. 모든 글자가 그것의 현실 이미지와 연관되기 때문에 쉽게 잊히지도 않는다. 객석에 앉은 서양 청중들의 표정이 무관심에서 호기심으로, 다시 진지함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 기본 글자 8개가 서로 합쳐지고 응용되면서 어느 순간 30여 개 글자를 알게 된다.

- 사람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면? 크다(大, 클 대)

- 입 안에 사람이 있는 건? 죄수처럼 갇혀 있다는 뜻(囚, 가둘 수)

- 나무 두 그루가 모이면? 숲(林, 수풀 림). 세 그루 모이면? 삼림(森, 수풀 삼)

- 나무 아래에 널빤지를 놓으면? 근원(本, 근본 본)

- 나무 두 그루에 불을 지피면? 탄다(焚, 불사를 분)

- 태양이 둘이면? 번창한다(昌, 창성할 창). 셋이면? 빛난다(晶, 밝을 정)

- 해와 달이 함께 빛나면? 밝다 혹은 다음 날(明, 밝을 명, 날샐 명)

- 해가 지평선 위로 올라오는 것은? 해돋이(旦, 아침 단)

- 문 사이에 입이 있으면? 누구 계시냐고 물어 보는 것(問, 물을 문)

- 문에 사람이 서 있으면? 흘끗 보게 된다(閃, 번쩍일 섬)

글자를 알게 되면 그 다음은 글자의 조합인 문자로 넘어간다. 예를 들어 불(火)과 산(山)이 함께 있으면 불을 뿜는 산, 즉 화산(火山)이 된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일본은 예로부터 ‘해 뜨는 나라’라고 불렸는데 해(日)와 근원(本)을 합쳐 일본(日本)이란 명칭이 생겨났다. 일본이란 두 글자 뒤에 사람(人)을 두면 일본인(日本人)이다. 고대 중국 황제들은 정적들을 산 너머로 추방했는데, 그래서 산이 두 개 겹쳐 있으면(山+山) 나간다는 의미(出, 날 출)가 된다. 어디가 나가는 곳인지를 말해주는 입은 출구(出口)이다.

문자는 문화의 거울이다. 문자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레 상대방 문화에 대한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인들에게 한자를 이해시키려는 샤오란의 노력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 있어도 되는 걸까? 알다시피 전세계 언어 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우수한 문자로 한글을 꼽는다. 실제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세계 모든 문자를 합리성·과학성·독창성 등으로 심사해 순위를 매겼더니 단연 한글이 1위를 차지했다. 유네스코에서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처럼 고유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들에게 한글 사용을 권장하기까지 한다. 급기야 언젠가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언어학자대회에서는 한글을 세계 공통어로 쓰자는 의견이 나오기까지 했다(고맙긴 한데 적잖이 당황스럽다).

한글은 제작자(세종대왕), 제작 장소(집현전), 제작 년도(1446년), 그리고 매뉴얼(훈민정음 해례본)까지 남아 있는 전 세계 유일한 글자다. 자음 14개와 모음 10개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영어·일어·중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는 300~500개인 반면 한글은 무려 1만1172개다). 초성·중성·종성으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라서 듣는 그 즉시 빠르게 타이핑이 가능하다(중국어나 일본어는 우선 영어로 입력한 후에 자국어로 변환해야 한다). 과학적이고 규칙적이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는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자는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훈민정음 해례본).

l 한글을 세계 공통어로 쓰자는 의견도
 한국의 대표 상품인 한글을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다.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태양의 후예’들과 대화하고 싶은 한류 팬들을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한글을 아는 세계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지평이 그만큼 넓어진다는 뜻이다. 외교·통상·문화·관광·무역·산업 측면에서의 이득은 일일이 따져보기 힘들 정도다. 한류에 한글을 더 많이 담고, 한글 디자인도 더 많이 개발하고, 한글 교습법도 더 다듬어야 한다. 아, 제일 먼저 TED 무대에서 누군가 한글의 매력을 소개했으면 싶다. 친근한 외모에 발음까지 정확한 김성주, 혹은 김주하 아나운서가 딱이다. 그 분들만 동의한다면 영문 스크립트는 필자가 기꺼이 써 드리고 싶다. 중학교 때부터 팝송으로 다져진 묵직한 영어 실력으로 말이다.

<샤오란의 TED 강연 영상>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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