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대회러시…"과공도 비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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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옛 속담에 「장님, 손(객) 보듯 한다」는 말이 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을 소홀히 대접하는 주인의 태도를 나무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과공은 비례」라는 말도 있다. 반드시 손님에 한해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남을 지나치게 융숭히 대접해도 오히려 예가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는 예전부터 해코지하려는 사람을 빼놓고는 내 집에 찾아든 손을 박대하여 쫓아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설혹 떠돌이 동냥아치이거냐 문둥이·당창장이 일지라도 개다리 소반에 간단한 찬과 식은 밥한덩이라도 얹어 행랑채 툇마루에 내놓고 허기를 면케하여 쉬어가도록 하는 인정과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손님을 소홀히 대접하는 것을 무례로 책망했고, 주인 스스로도 이를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손님을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지나치도록 대접하거나, 주인의 자기 과시욕 때문에 손님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호사스런 대접을 받았을 때도 손님은 오히려 불편하고 미안한 생각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쾌감까지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손을 대접함에 있어 정성이 부족하거나 혹은 지나칠 때 비난의 대상이 됐던 것같다.
요즈음에는 이런 대상을 바라지 않는 양속과 미풍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것은 각박해진 생활의 탓일 뿐 우리민족의 심성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이러한 인정의 불씨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불행한 이웃에 쏟아지는 온정의 손길을 볼때마다 그런 믿음이 잘못된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손님접대의 양속이 왜곡현상을 빚고 있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너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외국인에 대해 사족을 못쓰고 과잉친절을 베풀고 과잉접대에 정신을 못차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한국은 「외국인의 천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필자 혼자만의 주관적 느낌은 아닌듯 싶다.
실례를 들어보면 한이 없다. 관광호텔 로비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직원의 태도를 보면 외국인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친절하면서도 내국인의 질문에는 퉁명스럽기가 일쑤다. 무학무식한 서양인 떠돌이가 세계 여러나라를 무전으로 전전하다가 한국에 와서는 외국어학원의 「선생」이 되고 그 선생이라는 입장을 이용하여 공짜 방, 공짜 잠자리를 즐기면서 여대생까지를, 그것도 여러명씩 거느리고 농락했다는 사실에는 「과공이 비례」 정도가 아니라 창피하고 기가 꽉 막힐 지경이다. 손님접대가 아니라 주인이 손님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는 느낌은 지나친 것일까.
외국인이 참가하는 무슨 행사나 국제회의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예외가 아니다. 행사의 외화를 돋보이기 위해 억지 초청된 사람들이 특급관광호텔에서 숙식을 하는 예는 회다반사다. 행사나 회의가 있을 때마다 시내 곳곳에 화려한 현수막과 선전탑이 세워지기 마련이고 회의장은 도심 일류호텔이며 호화파티가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린다.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다는데는 이의가 있을수 없으나 손님을 맞는 주인의 태도와 찾아온 손님의 처신은 양쪽 다 분수와 격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손님도 떳떳하고 주인도 당당할 수 있다.
주인의 태도가 필요이상으로 친절할때 그것은 비굴한 인상을 주게된다. 베풀어주고 오히려 욕을 먹는다.
60년대 대유엔외교가 절정을 이룰때의 일이다. 서양의 모국가원수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자 정부는 본인은 물론이요 1백여명에 이르는 수행원들에게 최고의 환대를 베풀어 보냈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간 수행취재기자들은 1인부 국민소득이 1천달러도 못되는 나라에서 외빈접대에 낭비가 심했다고 오히려 질타의 화살을 일제히 쏘아댄 적도 있었다. 선심이 오히려 비난으로 돌아온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에서 열릴 국제행사가 자그마치 1백70여건에 참가예정자 수만도 5만7천여명에 이르리라고 한다. 또 앞으로 86아시안게임, 88국제올림픽 등을 계기로 수많은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찾아올 것이 예상된다.
우리국민이 그들을 대할때 『외국인이므로』 또는 『외국인이 볼때』 운운하면서 요란을 떨 필요가 있을까.
물론 손님을 맞으려면 집안 청소도 해야하고 그릇도 깨끗이 씻어야 하며 음식상 준비도 해야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외채 4백억달러가 넘는 국가와 국민으로서 분수에 맞고 당당하게 외국손님을 접대하고 행사를 치르는 의연함이 대전제가 돼야하겠다. 공존의 시대를 살고있는 성숙한 국민답게 말이다.
노규원 <본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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