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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변화하는 미국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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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시빌 워’(4월 27일 개봉, 앤서니 루소·조 루소 감독, 이하 ‘시빌 워’)가 개봉 첫 주말 273만 명을 돌파하며 무서운 흥행 성적을 올리고 있다. 정의 실현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영웅들의 대립을 그렸다는 점에서,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3월 24일 개봉, 잭 스나이더 감독, 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 속 대결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영화의 수퍼 히어로 간 싸움에는 현대 미국의 정치적·사회적 갈등과 고민이 엿보인다. 마블과 DC 영화를 중심으로, 최근 수퍼 히어로 영화의 경향과 변화를 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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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웅의 고뇌는 원작 만화에서부터

악당만 물리치는 수퍼 히어로 영화는 끝났다.

이른바 ‘내전(Civil War·시빌 워)의 계절’이다. 얼마 전 배트맨과 슈퍼맨이 한 판 맞붙더니, 지금은 어벤져스 군단이 서로 편을 갈라 전쟁에 나섰다. 수퍼 히어로 영화가 ‘정의의 사도가 악을 응징한다’는 단순한 공식에서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선과 악, 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뇌하는 초인 영웅들은 사실 원작 만화에서부터 다뤄 온 소재다. 다만 여기엔 시대에 따른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미국 만화계의 ‘골든 에이지(Golden Age)’라 불리는 1940~50년대엔 자유·정의 등 미국적 가치를 상징하는 슈퍼맨, 캡틴 아메리카 같은 애국주의 영웅이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이어진 ‘실버 에이지(Silver Age)’에는 미국 사회 내 시민운동이 확산됐다. 당시엔 스파이더맨처럼 체제 반항적인 캐릭터와 당시 인종 차별을 겪던 흑인이나 성(性)소수자를 상징하는 엑스맨 멤버들이 인기를 얻었다. 최근 수퍼 히어로 영화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80년대 ‘모던 에이지(Modern Age)’ 시절, 원작 만화에 나타난 현실 풍자·비판적 요소다. 미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짚으며 영웅(혹은 정부)이 가진 절대적인 힘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던진 『왓치맨』(앨런 무어 지음, 시공사), 진보·보수 진영 및 미디어의 허울과 위선을 꼬집은 『다크 나이트 리턴즈』(프랭크 밀러 지음, 세미콜론) 등 영웅들이 초인적 능력과 정체성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게 이때였다.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수퍼 히어로 장르는 영화 이전에 만화에서 출발한 미국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원형”이라며 “‘절대 권력이 타락할지도 모른다’는 주제 역시 『왓치맨』 같은 만화에서부터 제시된 것”이라 말한다. 냉전 체제 ’절대악’의 상징이던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수퍼 히어로 만화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로널드 레이건이 이끈 신보수주의 정부의 절대 권력 등 사회 문제로 눈을 돌렸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역시 “초월적 힘에 대한 영웅의 고뇌, 정의 실현 방식 등 최근 수퍼 히어로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이미 원작 만화에서 다뤄 온 것”이라 말한다. 만화 『시빌 워』(마크 밀러 지음, 시공사)가 처음 연재된 시점에서

10년이 지난 지금, ‘시빌 워’ 역시 이 맥을 그대로 스크린에 계승했다.

2.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 악의 축

‘시빌 워’는 정부가 수퍼 히어로의 활동을 통제하는 초인 등록법을 두고, 이를 지지하는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과 반대파의 수장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의 대립을 그린다. 추구하고자 하는 정의는 같아도, 이를 실현하는 방법의 차이가 이들을 적으로 만든 것이다. 악의 주체가 외부 세력에서 내부자로 변했다는 건 최근 수퍼 히어로 영화가 극명하게 보여 준 변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나치 세력, 구소련,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 등이 주를 이뤘던 절대악의 얼굴은 점차 이윤만을 추구하는 군수 기업 혹은 기술을 맹신한 과학자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때로는 피를 나눈 동족이자 자신이 소속된 조직 내 분열을 보여 주다가, 마침내 신념의 차이로 갈등하는 동료 간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강력한 영웅과 그에 걸맞는 적으로 대칭 관계를 유지하는 건 수퍼 히어로 장르가 가진 숙명이나 다름없다. 냉전 시대의 종식으로 절대악의 개념이 사라진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미국의 수퍼 히어로 영화가 적을 규정하는 방식이 9·11 테러 사건을 계기로 크게 변했다고 말한다.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지구 곳곳에서 ‘나름의 정의’를 수호해 왔던 미국이 9·11 테러 사건으로 끔찍한 희생을 거치며 당혹감을 느끼며 ‘무엇이 진짜 정의’인지 스스로 자문하게 됐다”는 것이다.

수퍼 히어로 영화의 교범이 된 ‘다크 나이트’(2008,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에서 이런 변화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악당을 강하게 몰아붙인 배트맨(크리스천 베일)의 힘(원인)이 아이러니하게도 미치광이 조커(히스 레저) 같은 치명적인 악당(결과)을 낳았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시빌 워’의 악당 지모 대령(대니얼 브륄) 역시 강력한 영웅의 출현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미국 입장에서 영웅과 악당의 관계는 거울에 비친 자국의 현실로 나타난다. 위키리크스 폭로, 국제 금융 위기, 민간 감시 프로그램 폭로 사건은 미국 스스로 자신의 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2014, 앤서니 루소·조 루소 감독)는 정치 스릴러 형식으로 이러한 변화를 솜씨 좋게 녹여냈다.

3.  미국의 현재와 그늘을 투영하다

적의 변화는 수퍼 히어로 영화 장르의 전반적인 정서를 크게 뒤바꿨다. 절대악을 응징하는 호탕한 액션 활극에서,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 마주한 영웅들의 고민을 어둡고 비극적인 톤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이 같은 변화 역시 “수퍼 히어로 영화 장르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라 말한다. 기존 권선징악형 스토리에서 벗어나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 성숙하고 다층적인 주제를 차용하며 그저 ‘덕후’들의 전유물이던 수퍼 히어로 영화가 전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는 주류 장르로 급부상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마블과 DC로 대표되는 미국의 수퍼 히어로 문화는 태생적으로 자국의 역사와 고민, 현실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슈퍼맨·캡틴 아메리카처럼 미국적 가치를 상징하는 영웅의 이야기에서 미국이란 국가가 가진 정체성은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미국은 신대륙 개척과 원주민 학살이라는 건국의 뿌리를 동시에 갖고 있는 나라”라고 말한다. ‘시빌 워’와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모의 죽음은, 짧은 시간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 이면엔 어두운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미국의 트라우마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정의 수호의 열망에 불탔던 미국이 베트남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의롭지 않은’ 전쟁을 치르며 겪었던 대의명분에 대한 딜레마를 은연중 수퍼 히어로 영화에 투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빌 워’에서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제2차 세계대전 영웅 캡틴 아메리카, 자본주의 시대를 겪으며 현실적 타협에 눈뜬 아이언맨은 각각 미국이 가진 두 가지 모습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한때 미국이 꿈꿨던 ‘이상’과 오늘날 미국이 마주한 냉엄한 ‘현실’의 두 얼굴 말이다. 영화 속 수퍼 히어로들에게도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화책 속 위대한 영웅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게 될까. 우리는 극장에 앉아 우리가 맞닥뜨린 어려운 현실의 질문들을 현대의 신(神)들에게 먼저 묻고 있는 셈이다.

수퍼 히어로의 명언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
Who Watches the Watchmen?

‘타임’ 선정 ‘1923년 이후의 최고 영어 소설 100선’에 꼽힌 유일한 만화 『왓치맨』에 나온 문장.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영웅과 감시 정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담고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1962년 출간된 스파이더맨의 데뷔 만화 『어메이징 판타지』 15호에 처음 등장한 대사. 수퍼 히어로의 초능력에는 그만한 책임감과 영웅다운 자질이 요구된다는 걸 강조하는 문구다.

수퍼 히어로 영화에 드러난 미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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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비아 협정│‘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어벤져스 군단이 악당과 싸우면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각국 정부가 수퍼 히어로의 활동을 관리·통제한다는 법안. 9·11 테러 사건 이후 조지 부시 정부가 테러 방지를 목적으로 추진한 애국자법(정식 명칭은 테러대책법)에 대한 은유다. 2006년 3월 정식 선포된 이 법은 위험 인물을 색출한다는 명목 아래 정부 산하의 사법 집행 기관에 전화·e-메일·의료 기록 등 시민들의 개인 정보를 자유롭게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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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 프로젝트│‘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5, 브라이언 싱어 감독)

뮤턴트(초능력을 가진 신인류)를 식별한 뒤 포획 및 사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거대 비행 로봇. 2010년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된 이라크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범인 무인 항공기 드론을 연상시킨다. ‘엑스맨’ 시리즈(2000~)의 두 리더,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와 프로페서 X(제임스 맥어보이)는 원작 만화에서 1960년대 흑인 인종 차별에 맞서 강경책을 고수했던 흑인 해방운동가 말콤 엑스(1925~65)와 비폭력 운동을 주장한 마틴 루터 킹(1929~68) 목사를 각각 빗댄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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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인사이트│‘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

미래의 국가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잠재적 후보 2000만 명을 공중 전함의 정밀 폭격으로 동시에 학살한다는 악의 집단 하이드라의 계획.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전 국민 개인 정보를 무차별 수집하는 감시 시스템으로, 2013년 6월 전직 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NSA(미국 국가안보국)의 비밀 정보 수집 프로그램 ‘프리즘(PRISM)’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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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파 감시망|‘다크 나이트’

악당 조커를 잡기 위해 배트맨이 고안한 감시망으로, 휴대전화 전파를 통해 특정 목소리 위치를 파악하는 시스템이다. 웨인 그룹 CEO 폭스(모건 프리먼)는 이를 두고 ‘한 사람이 갖기에는 너무 거대한 힘’으로 표현하며 배트맨에게 유감을 드러냈었다. 당시 미국 대선을 두 달 앞둔 시점에 개봉한 이 영화에서 놀런 감독은 청렴한 검사 하비 덴트(아론 애크하트)가 악당 투페이스로 타락하는 과정을 통해 미국의 현실 정치를 에둘러 반영했다. 속편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는 2011년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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