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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리액션 달인의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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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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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

기자가 되겠다고 언론사 입사 준비반에서 반 백수 생활을 하던 시절, 그 방에 들어서면 조간 신문과 하얀 수증기가 나를 먼저 반겼다. 언시반에서 가장 부지런한 누군가가 꼬박꼬박 가습기를 씻고, 가습기 살균제를 잊지 않고 넣었다. 이제는 기자가 된 고시반 옆자리 친구들과 “우리가 공부 안 하고 자리를 자주 비웠던 덕에 살아 있나 봐”라고 농담처럼 안도했지만 개운치 않은 마음이었다.

지난 월요일 옥시레킷벤키저 대표가 사과를 하겠다며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 가습기 살균제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불쑥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우르르 사진기자들이 몰려나간다. 폐가 손상돼 산소통을 달고 소리를 내지 못해 표정으로만 우는 소년 옆에서 사진기자가 울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정말로 미안하다면 피해자들을 찾아가서 ‘내 자식 죽인 놈은 네가 아니라 우리다, 옥시다’라고 사과해야 합니다.” 노트북을 열고 앉아 피해자 가족의 말을 타다닥 받아 치는데, 울컥 하고 뭔가가 올라와 모니터가 흐릿해진다. 제 손으로 가습기에 살균제를 넣었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폐병으로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들이 느꼈을 죄책감이 오죽할까.

우리 1980년대생으로 말하자면, 리액션의 달인들이다. ‘좋아요’를 잘 누르고 댓글도 정말 잘 단다. 오프라인에서 공분을 터트리는 데도 제법 익숙하다. 광우병 촛불 시위 땐 초를 켜고 광화문으로 나갔고, 세월호 참사 이후 한동안 노란 리본을 여기저기에 달아 두기도 했다. 이번엔 “이런 나쁜 기업 제품은 소비자로서 거부하겠다”는 리액션이다. 집안 곳곳에 옥시 제품이 깔려 있더라고 수선을 떨며 대안으로 쓸 수 있는 다른 회사 제품 리스트를 온라인으로 공유하고 있다.

리액션 달인의 문제는 “마음에 안 드니까 누가 좀 잘해보세요”라고 반응할 뿐, 무엇을 어디서부터 고쳐야겠다는 능동적인 액션에 약하다는 데 있다. 검찰과 언론이 가습기 살균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장롱 속 습기제거제와 세면기 옆 물비누가 5년 전에 산 제품은 아니지 않나. 옥시만 한국에서 쫓아내면 그만일까? 옥시 뒤에 숨어 여론이 잠잠해지기만 기다리는 다른 제조사들은 어떤가. 속이려 들면 전문가까지 섭외해 감쪽같이 보고서도 꾸며낼 수 있는 사회를 불매운동만으로 바꿀 수 있을까.

휴일 아침, 방 한구석에 쌓아둔 빨래를 들고 세탁기 앞으로 간다. 셔츠를 던져 넣고, ‘O2액션’이라 써 있는 핫핑크색 얼룩제거제 통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가 망설인다. 넣을까 말까. 이미 사버린 것, 내가 쓰든 안 쓰든 바뀌는 건 없다. 한 박자 늦은 리액션에 대한 죄책감을 하얀 알갱이들 속에 묻고 뚜껑을 닫아 세탁실 구석에 밀어 둔다.

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