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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문학 포기했다, 하고 싶은 얘기 쉽게 쓰는 게 최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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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 국내에서도 2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오베라는 남자』로 국내외 출판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소설을 쉽게 쓰는 것”이라며 독자와의 소통을 강조했다.

최근 한국문학, 소설의 위기는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손쉽게 확인된다. 국내 소설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그 공백을 파고 든 건 외국문학이다. 특히 요즘 들어 부쩍 고상한 문학성, 장르의 좁은 벽에 갇히지 않고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는 외국 문학 작품들이 눈에 띈다. 글로벌 이야기꾼이라고 할까.

| ‘반지의 제왕’처럼 소설 쓰고 싶어
복잡하고 환상적 언어 시도했지만
책 출간 고사하고 완성조차 못해

세계의 이야기꾼을 찾아서 <1> 『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배크만

올해 서른다섯 먹은 스웨덴의 '신예' 소설가 프레드릭 배크만도 그 중 하나다. 사실 그의 소설은 강렬하지는 않다. 대표작이 된 데뷔작 『오베라는 남자』(다산북스)가 그렇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다. 문장이 화려한 것도, 캐릭터가 매력적인 것도 아니다. 매사에 화가 나 있는 쉰아홉 살 먹은 사내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따라 죽으려 한다는, 소설의 핵심 줄거리도 어쩐지 신파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도 소설은 지난해 이맘때 국내에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20만 부가 팔렸다. 세계적으로 200만 부(2012년 스웨덴 출간), 판권을 사간 나라가 30개를 넘는다. 같은 제목의 영화로 지난해 만들어져 내달 국내에서 상영된다. 말하자면 배크만의 소설은 느릿하게 읽는 이를 감염시킨다. 한 번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주인공 오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그만큼 체취가 진하다.

과연 그의 소설 공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그런 작품을 만드는 걸까. 그의 장인정신은 뭘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최근 그를 만났다. 스톡홀름 시내에 있는 '오피스 호텔'이라는, 한국에는 없는 업태의 작업 공간에서다.

오피스 호텔은 우리의 오피스텔보다 훨씬 세심하게 입주자의 편의를 신경 써주는 것 같았다. 안내 데스크에 찾아간 용건을 밝히자 여직원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친절하게 안내한다.

배크만은 캡 모자를 눌러 쓰고 나타났다. 수줍어 하는 성격이라는 출판사의 귀띰과는 딴판으로 유창한 영어로,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과 소설 얘기를 들려줬다. 그의 작업실에는 오래된 타이프라이터가 많았다. “타이핑 소리가 듣기 좋아 수집한다”고 했다. 1920년에 만들어져 거의 100년 된 것도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자 배크만은 대뜸 한글에 관해 물었다. 초성·중성·종성의 조합으로 한 글자를 만드는 문자체계가 흥미롭다고 했다. '문자'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작품', '문학'으로 흘렀다.

문자에 관심이 많나.
“어려서부터 글자가 생긴 모양이 좋았다. 그래서 글을 빨리 배웠다. 친구 사귀는 법을 몰라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늘 뭔가를 썼다. 어머니는 내가 이상한 아이였다고 하셨다. 일고여덟 살짜리가 엄마나 아빠에게 불만이 생기면 그걸 편지로 써서 보여주곤 했다는 거다. 글을 쓰면 상황을 천천히 생각할 수 있었다. 다듬고 고쳐 글쓰기를 마치면 거기에 내가 하려던 얘기가 정확하게 들어 있었다. 글 쓰기는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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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된 게 당연한 것 같다.
“처음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반지의 제왕』처럼 내 삶을 바꾼 소설들, 나의 내면에 토네이도를 일으킨 작품들을 생각하면 천재나 작가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작가가 되고 싶어 한동안 말과 언어가 멋진 작품, 복잡한 작품을 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책 출간은 고사하고 작품을 완성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결국 작가가 됐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강한 인상을 심어주려 하지 말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쓰자고 마음 먹었다. 쓰고 싶은 인물에 대해 최대한 쉽게 쓰는 거다. 『오베…』가 그런 작품이다. 누구든지 읽을 수 있게 쓰려고 무척 공들였다.”
쉽게 쓰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목소리, 자연스러운 목소리(natural voice)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반응한다. 내 경우 자연스러운 목소리는 아주 쉽게 쓰는 거였다.”

| 독자는 진심·가짜 알아챌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즐기고 감흥 받는다면
‘비행기 소설’평가도 개의치 않아

배크만은 이 대목에서 “독자는 누구나 ‘불싯 레이더(bullshit radar)’를 갖고 있다”고 했다. ‘젠장맞을 감식안’쯤으로 이해하면 적당할 불싯 레이더 덕분에 사람들은 어떤 문학작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는 거다. 노래도 마찬가지.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불과 수 초만에 청중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가슴으로 느껴 노래하는지 아닌지를 귀신 같이 알아내는 레이더 덕분이다. 그러니 결코 독자를 속일 수는 없다는 것. 작가는 최선을 다해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시 음악을 예로 들면 모짜르트도 있고, 3개 코드만으로 연주하는 록음악도 있는 법이다. 록음악이 쉬워 보이지만 완벽하게 연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완벽하게 연주하면 사람들은 반응한다."

문학적으로 당신 소설은 록음악이라는 얘긴가.
"스웨덴 평론가들은 아마 내 소설을 상당히 낮게 평가할 거다. 내 아버지조차 내 작품을 비행기 안에서 읽기 좋은 '항공기 문학(airplane literature)'이라고 하신다. 난 상관 안 한다. 뭐라 부르든 내 작품을 독자가 읽어 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모든 작가가 호날두나 메시 같은 축구 선수가 될 순 없다. 나는 과거 이탈리아 대표였던 가투소 같은 선수를 높이 평가한다. 기술 면에서 최고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경기장 내에서 자기의 역할, 능력을 제대로 알았다."
『오베…』는 결국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 얘기 아닌가.
"맞다. 소설을 쓸 당시 갓 결혼해 첫 아이가 1년쯤 됐을 때였다. 힘들게 소설을 쓰며 내 아내와 아들이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그게 작품에 반영된 것 같다."
두 번째 작품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가 곧 한국에서 나온다(『할머니…』는 지난주 출간됐다). 어떤 작품인가.
"주인공 엘사는 어린 시절 나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무서워하는 일곱 살 여자아이다. 존경하는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말괄량이 삐삐』처럼 동화 같은 작품이다. 나는 동화를 무척 좋아한다. 동화 같은 작품이다."

사실 『할머니…』는 『오베…』보다 접근하기가 까다롭다고 느껴지는 작품이다. '깰락말락 나라' 등 종잡을 수 없는 그러나 복잡한 환상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 반복해 나타나서다. 불치병을 숨긴 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던 할머니와 엘사 사이에만 통하는 공통의 상상공간처럼 느껴지지만 소설 후반부 그 상상의 세계가 소설 속 현실을 애둘러 말한 거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에 모호하게 걸쳐 있다.

배크만은 “『오베…』를 출간했던 출판사가 『할머니…』를 출간하려 하지 않아서 출판사를 바꿔 냈다. 실은 『할머니…』야말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했다. 반응 역시 뜨거워 스웨덴에서만 40만 부가 팔렸다고 했다. 이 소설 역시 후반부로 가며 마음이 따뜩해지는 작품이다.

잇단 성공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는 물질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나와 내 가족이 원하는 것은 소설의 성공 전에 우리의 수입(내 아내는 경제적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으로도 얼마든지 누리던 것들이다. 달라진 점이라면 더 이상 돈 걱정 하지 않게 됐다는 정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결코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돈 걱정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나."
당신을 포함해 요나스 요나손 등 스웨덴 작가가 부쩍 인기다. 날씨 때문인가? 아니면 문학적 전통이 풍부해서?
"날씨 탓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이든 잘 나서려 하지 않는(reserved) 스웨덴 사람들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한 가지, 스웨덴에서 작가는 항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왔다. 문학은 언제나 예술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을 예술이라고 믿는다. 내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작가일지는 몰라도 나는 그들의 그런 생각을 이해 한다."

스톡홀름(스웨덴)= 글·사진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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