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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10년 → 5년 → 10년 → 서울 4곳 추가 …‘이 산이 아닌가 봐’ 면세점 정책 6개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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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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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희령
경제부문 기자

지난달 29일 서울 시내에 면세점 4곳을 추가하겠다는 관세청의 발표를 듣자 이른바 ‘나폴레옹 유머’가 떠올랐다.

정책 혼란에 경제 논리는 사라져
“늘리든 줄이든 이제 더 안바꿨으면…”

“나를 따르라!”(100만 대군이 험준한 알프스를 오른다)

“이 산이 아닌가 봐.”(헉헉...)

“아까 그 산이 맞았나 봐.”(허억헉...)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을 때 이 산 저 산 헤맸다는 우스갯소리다. 갈팡질팡하는 리더십을 꼬집는 이 유머가 생각난 것은 정부의 면세점 정책이 자꾸만 ‘아까 그 산’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면세업계에는 파란이 일었다. 개장 26년 된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23년 된 SK워커힐면세점 등 업계의 ‘터줏대감’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3년 몇몇 기업만 특혜를 본다는 이유로, 시내 면세점 정책을 ‘10년 단위 재승인’에서 ‘5년마다 원점에서 재심사’로 바꿨다. 국내 3위인 월드타워점은 다음달 문을 닫아야 한다. SK네트웍스는 오는 16일까지가 영업시한인 워커힐면세점이 사라지면 면세 사업부 자체가 사라진다. 그런데 정부가 신규 면세점을 추가하기로 하면서 이들은 회생 기회를 갖게 됐다.

지난달 ‘10년 단위 재승인’ 정책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힌 관세청이 이번에 또 ‘아까 그 산’으로 가보자고 한 것이다.

‘이 산이 아니다’는 판단이 섰다면, 아무리 고생해서 올라왔더라도 서둘러 내려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작정 올라간 게 잘못이다. ‘이 산이 맞는 산’인지 제대로 따졌어야 한다. 익명을 요청한 신규 면세점 임원은 “글로벌 명품은 백화점도 새로 유치하는데 최소 1년이 걸린다”며 “2~3년 영업하고 그만둘지 모르는 곳에 들어오려고 하겠느냐”고 했다. ‘5년마다 재심사’는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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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6000억원이 넘는 면세점이 문을 닫으면 시장이 흔들리고 수 천 명의 고용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도 당연히 처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결국 5개월만에 ‘4곳 추가’ 방침을 밝힐 것이라면 왜 지난해에 아예 7곳으로 늘린다고 발표하지 않았나. 한꺼번에 7곳이 늘어서 내년부터 시내 면세점이 13곳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손익을 꼼꼼히 따져서 아예 도전하지 않거나, 현대백화점처럼 넓어진 문호에 진작 뛰어들었을 업체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산이 아닌가 봐’ 정책 때문에 월드타워·워커힐 면세점은 만약 연말에 새 사업자로 선정되더라도 6개월은 영업을 못한다. 수 천억원 손실은 물론이고 직원들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신규 면세점들은 또 어떤가. 루이비통·샤넬·에르메스 등 콧대 높은 명품 업체가 아직 입점하지 않아 고전하고 있는데 ‘강자의 부활’이라는 그림자마저 드리웠다.

“5년이든 10년이든 상관없어요. 면세점을 늘리든 줄이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그저 이제는 제발 더 이상 바꾸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신규 면세점 고위 임원의 탄식이다.
구희령 경제부문 기자 hea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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