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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의 삿포로 ‘방탄 공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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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34면

일러스트 강일구

‘방탄소년단’이 삿포로에 왔다. 귀에 착착 감기는 랩과 칼 군무로 ‘빅뱅’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K힙합의 뜨거운 바람을 주도한다는 바로 그 팀. 한 전문직 여성이 “대학까지 졸업한 딸이 한국 힙합그룹 티켓 예매한다고 컴퓨터 앞에 붙어있다”고 하소연하더니 이들 때문이었다.


어색한 발음이지만 한국어 가사를 따라부르다 끝내는 감격에 겨워 흐느끼는 옆 자리 소녀를 훔쳐보며 한일관계에는 이처럼 흐뭇한 측면도 엄연히 있는 것이지 싶어 희망이 부풀어오르던 그 때, 한 아가씨 관객이 방탄소년단 리더인 ‘랩몬스터’라고 한글로 쓴 피켓을 흔들며 일어났다. 그러자 검은 양복의 남성이 나타나 그녀에게 뭔가 소근거리더니 자리에 앉혔다. 이런 실랑이가 두어번 반복된 뒤 아가씨 관객은 피켓을 흔들 의욕을 접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못본 무슨 위험 요소라도 그녀에게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았지만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삿포로에선 조금 얇다싶은 레이스 치마로 한껏 멋을 냈을 뿐 그녀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수백만 한류팬 중에서도 극히 얌전한 부류에 속했다.


새삼 공연장을 돌아보니 검은 양복의 남자들 여러 명이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비장한 태도로는 곧 일본에서 열릴 G7 정상회담 경호팀 못지않았다. 안전을 중시하는 일본이라지만 입석을 합쳐 2000석 규모의 공연장도 이토록 물샐 틈이 없는 걸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공연 관계자 등을 만나 안전조치에 대해 들어봤다.


이날 공연의 안전 전문요원은 30명. 대기실 관리나 로비 안내 등을 맡은 스탭 50명을 제외한 숫자다. 이들은 공연 전에 공연장의 도면을 보면서 수차례 회의를 했고 경찰·소방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음향·조명은 물론이고 만일의 사고시 관객 대피 등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테크니컬 리허설’을 거쳤다. 10대 관객이 많았던 만큼 객석에는 의사를 포함한 의료진 2명이 배치됐는데, 이들 덕분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숨을 몰아쉬던 소녀에게 간단한 응급조치를 할 수 있었단다.


일본 야후에서 ‘안전’과 ‘공연장’을 키워드로 검색을 해봤다. 맨 앞에 그것도 수십 개나 되는 기사가 떴는데 다름아닌 2014년 한국 판교 공연장에서의 환풍구 추락사고를 다룬 것이었다. 일본 사이트에 웬 한국 사고인가, 괜히 머쓱해져서 몇 페이지를 더 넘겼더니 같은 2014년에 지방의 소극장에서 지진예보가 나자, 극장 관계자가 즉시 관객들을 대피시킨 후 텅빈 무대 위에서 10여분간 안전공지를 했다는 다소 맥빠지는 기사였다. 페이지를 더 넘겨보니 사이노쿠니 예술극장의 ‘극장 연출공간의 운영 및 안전에 관한 가이드라인’이라는 문서가 나왔다. 자연재해나 안전사고 발생시 행동 수칙 등이 보험 약관 만큼이나 작은 글씨로 38쪽에 걸쳐 담겨있었다. ‘재해나 화재 발생시, 음향시설이 자동으로 차단되지 않아 긴급피난 방송이 객석에 들리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에 대비한 조작 방법 및 후속 조치 방안을 마련하고 숙지할 것’과 같은 세세한 매뉴얼이었다. 사이타마시에 위치한 이 극장은 객석 150석에서 776석짜리의 홀을 6개 갖춘 중규모의 극장에 불과했다.


“한류 공연은 무대의 화려함이나 연출기법 면에선 최고 수준이지만 관객의 안전이나 질서 유지에는 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국내의 주요 방송사나 공공단체가 주최하는 행사를 가봐도 마찬가지. 비상 동선도 없고 안전요원은 턱없이 부족하며 객석에 대한 통제가 전혀 안돼서 공연 내내 관객들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움직이다 복도고 계단이고 꽉 채워버린다. 이런 상태에서 사고라도 난다면 대참사로 이어질 것이란 생각 때문에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일본인 관계자와 동행했다가 낯이 뜨거워져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도 있다. 공연을 몰래 촬영하여 인터넷 같은 데에 뿌리는 등의 범법행위도 객석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한국의 공연 실황 음반 사업이 무너진 건 자업자득이다.”


한국과 일본의 공연문화에 밝은 한 기획자가 들려준 경험담은 신랄하지만 반박하기 어렵다. “왜 달라지지 않을까” 우문(愚問)을 던지니 “사람을 경시하기 때문이 아닐까요”란 답이 돌아왔다.


일본을 ‘매뉴얼 사회’라고들 한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판에 박힌 듯 행동하여 융통성이 없다는 부정적인 뜻도 담고 있다. 그러나 30년 넘게 신문사·기업·정부에서 일해온 내 경험에 따르면 좋은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뭐라해도 그 집단의 실력인 경우가 많다. 갑갑하리만치 매뉴얼을 깐깐하게 지키는 일본인이라면 적어도 어이없는 안전사고를 내지는 않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긴다.


일본의 역이나 공항·백화점 어디에건 꼼꼼이 적혀있는 안전 수칙, 끝없이 들려오는 안전관련 안내 방송은 사실 유난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슴아픈 세월호 사고 후 얼마 안돼 판교 공연장 사고로 16명이 목숨을 잃었던 우리는 지금 얼마나 달라졌을까. 세계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한류 공연도 이제 ‘안전’의 관점에서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이 모여드는 한바탕 축제에서 우리가 보여줄 것은 스타들의 매력뿐 아니라, 안전에 대한 시스템과 철저한 점검, 그를 통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완성도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한류는 저작권· 음원 등 1차적인 수입에 그치지 않고 “한국 것은 멋있는데다 안전하고 믿을 수도 있다”는 이미지로 연결돼 훨씬 넓고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한혜진주 삿포로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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