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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지지자로부터 들은 “너무 작은 티셔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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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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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미국 대선 경선의 출발점이자 대세를 보여주는 아이오와주 경선을 이틀 앞둔 지난 1월 30일 저녁이었다. 도널드 트럼프의 유세가 열리던 대븐포트 시가지의 애들러 극장 앞엔 트럼프 티셔츠와 배지를 파는 노점이 늘어서 있었다. 트럼프 열기를 취재하기 위해 한 노점상에게 이것저것 묻다가 15 달러짜리 티셔츠를 사서 손으로 들어 올려 보고 있는데 마침 유세가 끝나며 극장 입구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몰려 나왔다. 그중 일단의 백인 젊은이들이 티셔츠를 놓고 “정말 작네. 정말 작다(so small)”고 하며 지나갔다. 체구가 작다는 비아냥이다. 자기들끼리 슬쩍 얘기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다가와서 손가락으로 티셔츠를 가리킨 뒤 시선을 마주한 채 했던 말이었다. 유세 분위기에 취해서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취재를 위해서나 피아의 숫자로 보나 대거리를 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 몇 주 후 버지니아주 공화당의 아시안 담당 간부를 지냈던 한인을 만났더니 첫마디부터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 세력이 지지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지난주 지한파 의원 모임인 코리아코커스의 공동의장인 제리 코널리 민주당 하원의원도 인터뷰 도중 엇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나도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인데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를 다 추방하겠다고 한다”며 “이들은 악의를 품고 미국에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미국에서 기회를 찾기 위해 남은 만큼 악마 취급을 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정확한 개념 정의는 아니지만 미국은 현재 지구촌을 주도하는 유일 초강대국이라는 점에서 21세기 제국이다. 역사적으로 제국은 다양성에서도 동력을 찾아 흥했고 다양성을 관리하지 못해 망했다. 명나라의 전성기였던 영락제 시절 남해 원정을 주도했던 정화(鄭和)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눈이 파란 색목인(色目人)이었다. 로마 제국은 변방의 소국이던 이스라엘의 신흥 종교를 체제를 위협하는 급진 세력으로 탄압하다 보편성을 발견한 뒤 이를 국교로 수용하며 제국의 통합을 꾀했다. 미국 역시 세계사의 중심으로 급성장하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에서 이민을 받아 노동력과 문화를 수혈했다. 트럼프의 할아버지인 프레데릭 트럼프도 바로 이 기간(1885년) 고향인 독일을 떠나 미국에 왔다. 제국의 성장기엔 다양성이 확장의 에너지가 된다. 반면 다양성이 갈등으로 번지면 제국은 관리 비용이 급증한다. 과거엔 반란이었다면 지금은 사회 분열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추종자 중엔 미합중국에서 떨어져 나와 백인만의 사회를 원하는 극단적인 이들도 있다고 우려했다. 물론 극히 예외적인 일부다. 또 미국 전체가 트럼프의 메시지에 열광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이에 대한 분노와 조롱을 표출하도록 만드는 게 트럼프의 힘이라면 미국은 지금 트럼프로 인해 제국의 통합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