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허허실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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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는 신물을 켜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정치를 하면 가장 바람직스러울까를 자주 생각하게된다. 정치 후진국에서 살아가는 백성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싶다.
범박하게 말해서 정치에는 국민적 합의, 곧 여론을 「끌어가는 정치」 와 여론에 「끌려가는 정치」가 있을 것이다. 문맹률이 높고 못살고 정치의식이 낮은 후진국일수록 「끌어가는 정치」 를 할 터이고 중산층이 두꺼운 소위 다이어먼드형 국가일수록 「끌려가는 정치」 를 할 것은 자명하다. 미국 같은 나라는 반전 시위라는 강렬한 여론에 못 이겨 역사상 첫패배라는 치욕을 감수하면서도 「끌려가는 정치」를 당당하게 해치운 좋은 본보기를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요즘 정치 현실은 어떤가?
한 마디로 말해서 「끌어가는 정치」 도 아니고, 「끌려가는 정치」 도 아닌 듯이 보인다. 여론을 한곳으로 모아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에도 게으르고, 여론을 정정당당하게 받아들일 대범한 자세는 더욱이나 없다.
실례를 들어보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최다 채무국이면서 빚을 빨리 갚자는 강렬한 의지라도 표명하지 않고 있으며, 빚을 갚자는 여론도 현실감 없는 숫자나 나열하면서 적당히 호도해버린다.
누누이 문화창달과 교육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교육제도의 개선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청사진도 없고, 눈치놀음판이라는 대학입시제도조차 빗발 같은 여론을 덮어버린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정치는 여론을 아예 무시해버림으로써 국민을, 나아가서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나가야할지를 모른 채 갈팔질팡이다. 정치부재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고, 국가관이나 가치관의 오리무중시대라는 말이 실감나는 형편이다.
남녀의 성별을 바꾸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할 수 있다는 국회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여론을 역시 무시해버린 무능한 국회였지만 말이다) 의 개원도 여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 늦어졌고, 협상조건으로 제시한 몇 가지 안건도 여론을 왜곡, 또는 호도해버리니 질질 끌려가는 정치, 또는 억지로 끌어가려는 정치만을 하려고 우왕좌왕하는 꼴이다.
여론을 의식하고 있다는 국회의원들의 말은 결과가 잠꼬대임을 점점 증명해 보이고있을 뿐이다. 여론을 국회 속으로 수렴하겠다는 그들의 하나같은 공약은 공수표로 끝나고말것인가.

<『파한잡기』새필진>
◇오늘부터「파한잡기」필진이 바뀝니다. 곽광수 (서울대· 불문학) 신복용 (건국대· 정치학) 최승범 (전북대·국문학) 박청수(원불교강남교당교무) 배창호 (영화감독)김원우(소설가)씨가 8월말까지 집필해주시겠습니다. 김원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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