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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소록도 돌아온 마리안느 할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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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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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간 전남 소록도에서 ‘한센인의 친구’로 지냈던 마리안느 수녀는 26일 “소록도에서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사진 보건복지부·소록도병원]

‘마리안느 할매’.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 마리안느 스퇴거(82) 수녀를 일컫는 별칭이다. 백발에 파란눈인 외국인이 사투리 섞인 한국말을 쓰면서 된장찌개를 즐기는 모습이 친근해서다. 40년 넘게 한센인들과 동고동락하며 봉사의 삶을 살았던 오스트리아 출신 ‘할매 수녀’가 11년 만에 소록도를 다시 찾았다. 26일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만난 그는 “아름다운 섬에 다시 오게 돼 기쁩니다. 오랜만에 돌아와 보니 환자들 집도 고쳐져 있고 많이 변한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고령으로 발음이 안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한 한국말로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한센병 환자 43년 돌본 스퇴거 수녀
2005년 건강 나빠져 오스트리아행

소록도병원 100돌 행사 위해 방한
“여기서 좋은 시간 보냈고, 행복했다”

1962년 28세의 평범한 간호사이자 선교사였던 그는 광주대교구의 요청을 받은 인스브루크 주교의 소개로 한국에 왔다. 당초 약속된 기간은 5년. 하지만 이를 훌쩍 넘긴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돌봤다. 사람들의 호칭도 자연스레 ‘수녀님’이 됐다. “제가 한 일이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치료를 마친 환자를 가족들이 기다리며 받아줄 때가 너무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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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그가 젊은 시절 한센인 가족을 돌보던 모습. [사진 보건복지부·소록도병원]

많은 사람들이 한센병 환자를 ‘문둥이’라 손가락질하며 피했지만 그는 먼저 환자 곁으로 다가갔다. 스스럼없이 맨손으로 피고름을 짜내고 소독해 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에 환자들은 어느새 친구가 됐다.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 사람들과 직원·환자들 구분하지 않고 그냥 친구로서 같이 놀면서 살았죠.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서 살았어요”라며 웃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2005년 11월, 마리안느 수녀는 친구들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출국 이틀 전 주교 신부 등 극소수에게만 귀띔한 채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 짐이 되기 싫어 떠난다”는 편지 한 통만 남겼다. 한국서 대장암 수술을 세 차례 받는 등 건강을 자신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친구들 몰래 가느라 저도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나중에 전화로, 편지로 친구들에게 설명하면서 한을 풀었죠.”

그렇게 몸은 오스트리아로 떠났지만 마음은 소록도에 남아 있었다. 절친했던 병원 간호팀장과 토요일마다 한 시간씩 통화하면서 소록도는 잘 있는지, 소록도 사람들은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소록도성당 등의 초청을 받아 소록도병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3일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리운 고향에 돌아와서였을까. 그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천식도 소록도에 오니 싹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100주년 행사를 마친 뒤 다음달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예정이다.

마리안느 수녀는 이번이 사실상 첫 언론 인터뷰다. 그동안은 자신의 활동이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해왔다. 하지만 고흥군은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하겠다고 밝혔고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도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할매 수녀’의 마음은 소박했다. “예수님 부름을 받아 소록도까지 왔고, 한국 땅에서 내 마음을 심은 거죠.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고, 진정 행복했습니다.”

소록도=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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