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을 길40년(27) 근대인쇄문화도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우리의 인쇄문화사는 세계 최고의 인쇄물인 『무구정광대타나니경』을 비롯하여 『팔만대장경』등 정교한 판각과 방대한 양의 개판사업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의 출판인·인쇄인들은 문화민족의 후예임을 긍지로 삼고 자기 일에 종사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근세사는 이 선인의 유업을 계승·발전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그 결과 거꾸로 인쇄기술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오게 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인쇄기술이 도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백여년전인 1883년이있다.
즉, 그해10월1일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기관인 박문국이 정부에 의하여 설치된 것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인쇄한 것이 한성순보. 그러나 일제는 한국사람으로 하여금 인쇄기술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우리의손으로 근대식 인쇄기술을 소화하고 발전시키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는 해방후 부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중세로 올라가면 출판사와 서점과 인쇄소는 거의 미분화한 하나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던것이 그 이후 차차 분업화하여 출판사는 도서를 기획하고 생산하고 배포하는 모든 일을 하되, 인쇄소가 그 생산과정을 수주하여 맡고, 서점은 생산된 도서의보급을 맡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지금도 어쩌다가 내가 출판업을 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면 상대방은 『활판이요, 오프세트요….기계는 몇대나 있소』하고 질문해올 때가 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인쇄와 출판은 별개의 분업체로 발전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가인쇄시설을 가진 출판사도 있고, 영업상또는 편의상 출만등록을 해놓고 가끔 출판하는 인쇄소도 있지만, 그 어느 쪽도 편의서실이나 부대시설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인쇄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하자.
개화파의 정치인 박영효 (철종의 사위)가 1882년 수호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현대식 인쇄기계가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 들여온 최초의 인쇄기계는 평야부일 라는 사람이 만든 초창기 일제 수동식 활판기로 기계값은 한대에 1백원정도. 동시에 일본인 기술자 정상각오낭을 초빙하여 박문국의 인쇄업무를 관장케 했다.
이 정상각오낭이라는 인물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갑신정변때 실력행사에 사용될 폭약과 일본도등을 들여오는 일에 암약한자다. 그러니 단순히 인쇄기술을 관장하기 위하여 온 자가 아니었다.
박문국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 창설된지 5년만에 폐지되었다. 박문국에 뒤이어 1884년 광인사 인쇄공소가 목활자로 인쇄해 오다가 최초로 연활자로 바꾸어 인쇄하기 시작한다. 이 광인사는 반관반민의 업체로 『충효경집』『농정신편』등 많은 책을 찍어냈으며, 최초로 국한문 혼용 서적을 인쇄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 다음으로 1885년 설립된 배재학당 인쇄부에서는 최초의 한글신문을 찍었고, 미제 자동절단전지기를 최초로 석유 발동기를 사용하여 돌렸다고 하는데, 『천노력정』등 많은 종교서적을 인쇄하였다. 이 인쇄부는 그후 차차시설을 확충하면서 김홍경·정경덕·이덕여·곽종섭등 한국인 기술자에게 일을 맡겼다.
1903년에 생긴 전환국 인쇄소를 보자. 원래 전환국이란 용화를 만드는 관청이었는데, 지폐나 기타 유가증권을 만들 필요가 생기자 인쇄시설을 갖게된 인쇄소다. 이 인쇄소 자리는 지금의 서울용산구원효로1가3번지. 명색은 구한국정부의 인쇄시설이였지만 실은 일본인들의 손아귀에서 놀았다. 합방후에는 총독부 관보 찍는일로 밤을 새웠다고 원로 인쇄인 고박인환씨는 회고했다.
다음은 그 무렵의 민간 인쇄계를 둘러보기로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