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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만에 영국 정보기관 사과받은 튜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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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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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보기관인 정부통신본부(GCHQ)의 수장이 동성애자란 이유로 탄압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재 과학자 앨런 튜링(1912~54·사진)에 대해 62년 만에 공식 사과했다.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암호체계를 해독해 승리에 기여한 인물이다.

나치 암호 풀어 2차대전 승리 기여
동성애 혐의로 기소, 54년 결국 자살
“성 소수자 박해 정당화할 수 없어”

로버트 해니건 GCHQ 국장은 16일(현지시간) 성소수자 인권단체 스톤웰이 주최한 모임에 참석해 “당대에 일반적이었단 이유만으로 튜링과 같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박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며 “그가 겪은 일들은 끔찍한 것이었으며 우리는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학 천재였던 튜링은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이던 1937년 오늘날 컴퓨터의 기본 원리를 구현한 ‘튜링기계’라는 연산장치를 고안해 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GCHQ 전신이던 영국 정보부 산하 암호 해독반에 합류해 독일의 암호체계 ‘이니그마(그리스어로 ‘수수께끼’란 뜻)’ 해독에 나섰다. 이니그마는 타자기처럼 사용하던 암호기로 당시 연합국에게는 해독이 전혀 불가능한 골칫거리였다. 튜링은 40년 ‘튜링봄베’라는 암호해독기를 개발하고 그 성능을 더욱 향상시켜 2차 세계대전 중반인 1943년부터는 당시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독일 잠수함의 이동 경로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이는 전황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45년엔 전쟁 중에 세운 공로로 대영제국훈장(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받았다. 하지만 암호 해독팀의 존재는 그 뒤에도 상당기간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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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역을 맡은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중앙포토]

튜링은 종전 후 맨체스터대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으로 인공지능 연구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52년 집에 도둑이 든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는 과정에서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성 문란’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에서 화학적 거세 판결을 받고 대학에서 쫓겨난 그는 54년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튜링은 60년대 이후 재조명됐다. 미국 계산기학회는 66년부터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튜링 상’을 수여했고, 90년 그가 고안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AI)에게 수여하는 ‘뢰브너 상’이 제정됐다. 2014년엔 튜링의 암호해독 과정과 말년의 어려움을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개봉했다. 해니건 국장은 “튜링은 다르게 생각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시대의 천재였다”며 “그를 일찍 잃은 건 국가 전체의 손실이었으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영국 정부는 앞서 2009년 공식 사과했고 2013년 튜링의 형사범죄 혐의 역시 사면됐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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