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특별 인터뷰] 김경재 신임 자유총연맹 회장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청년·여성 역할 대폭 확대해 조직 환골탈태시키고 ‘통일운동 선봉대’로 만들 터… 지속적인 인재교육·육성 통해 연맹을 보수진영 ‘인재의 보고(寶庫)’로 키워나갈 것
기사 이미지

김경재 제16대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장은 “임기 중 정예요원 100만 명을 양성해서 자유총연맹을 통일의 선봉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 회장은 또 “이를 실현하려면 자유총연맹 행정조직의 슬림화 등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홍보특별보좌관을 지낸 김경재(74) 전 의원(15·16대)이 제16대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장에 선출됐다. 김 회장은 2월 25일 열린 자유총연맹 중앙회장선거에서 재적 대의원 459명 중 368명이 투표한 가운데 205표(득표율 55.7%)를 얻어 163표(득표율 44.2%)에 그친 허준영(64) 제15대 회장을 따돌리고 3년 임기의 신임회장에 선출됐다.

“연맹 중앙본부 모든 직원, 북한 전문가로 양성하겠다”

김경재 자유총연맹 회장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도 불린다. 전남 여수 출신으로 순천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1년 김대중 신민당 대선후보 선전기획위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유신 체제하에서 재야운동을 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16년간 망명생활을 했고, 이 기간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을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이 책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부터 84년까지 미국 뉴욕의 한인을 상대로 한 언론에 연재됐다. 한국에서는 금서(禁書)였다가 민주화를 맞은 1987년 말 3권으로 출간됐다. 300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은 그 후 발간된 60~70년대 정치 다큐멘터리, 각종 회고록, 현대사 평론 등에 단골로 인용됐다.

기사 이미지

지난해 3월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통령비서실 홍보특보 위촉장을 받고 있는 김경재 자유총연맹 회장. 김 회장은 12월까지 10개월 동안 홍보특보로 활동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귀국한 김 회장은 다시 DJ 캠프에 합류했고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7년 대선 때는 새정치국민회의 홍보위원장을 맡아 DJ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웠다. 그렇지만 대북정책에서는 DJ와 견해가 조금 달랐던 듯하다. 김 회장은 “1999년 DJ의 지시로 평양에 다녀온 뒤 ‘북한을 무조건 풀어주면 안 된다. 노벨평화상 받으려고 서두르시느냐’고 했더니 크게 화를 내시더라”고 털어놓았다.

김 회장은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캠프의 홍보 본부장을 맡아 당선에 일조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새천년민주당의 분당(分黨) 과정에서 친노와 갈라서게 됐다. 그는 2010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전남지사 선거, 2011년 4월 무소속으로 순천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해 고배를 마신 뒤로는 주로 집필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2012년,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에게서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사과할 부분은 사과하고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겠다면 돕겠다’고했더니 박 후보가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국민대통합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을 맡아 승리에 힘을 보탰다.


기사 이미지

1996년 초선의원 시절의 김경재 회장. 당시 김경재 의원이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정치·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을 하고 있다.

역할 모색하던 중 선배들로부터 출마 권유받아
자유총연맹 회장에 당선된 뒤로 중앙회장으로서 업무를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취임식은 3월 10일 전후 갖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번엔 4월 중순 이후로 미뤘다. 김 회장은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연기를 결정했다”며 “총선 후 손님들을 제대로 모시고 취임식을 갖겠다”고 밝혔다. <월간중앙>은 당선과 동시에 업무 파악에 여념이 없는 김 회장을 3월 2일 서울 남산 자유센터에서 만나 자유총연맹 개혁 청사진과 비전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출마 선언 한 달도 안 돼 치른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자유총연맹 회장선거는 기본적으로 외부인에게 대단히 불리하게 설계돼 있다. 선거 기간이 매우 짧을 뿐 아니라 선거운동 방법도 제한적이어서 외부인이 자유총연맹 내부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람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래서 저는 원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자유총연맹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 이것이 제가 대의원과 회원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각 지부와 지회 입장에서 어느 후보가 승리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할지를 따지기 이전에, 누가 연맹의 존재 이유와 방향성에 부합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가슴을 열고 판단해달라는 것이었다. 대의원과 회원들의 양심을 깨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가슴을 열어 연맹의 미래에 대해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보자고 호소했다. 다행히 선거운동 기간 중반부터 저의 방향성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인식을 공유하게 됐다. ‘언젠가 없어질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조직에 머무를 것이냐? 아니면 모두가 합심해 또 한 번의 중흥의 기회를 맞을 것이냐? 전자라면 두 후보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고민할 수 있지만 후자라면 고민할 이유 없이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이런 인식이 확산된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재선의원 출신으로 이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특보를 지냈다. 정치권이 아닌 자유총연맹 회장 선거에 뛰어든 계기는 무엇인가?
“저는 국회의원으로는 재선에 머물렀지만 김대중·노무현·박근혜 세 분의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있어 중심에서 일하는 ‘호사(豪奢)’를 누렸다. 정치인으로서 그만한 보람과 영광이 어디에 있겠나? 정치인으로서는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이룰 것을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십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김대중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지근(至近)에서 모시면서 ‘김경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난 1월 책을 한 권 출간했는데 제목이 <박정희와 김대중이 꿈꾸던 나라>다. 산업화를 대표하는 박정희, 그리고 민주화를 대표하는 김대중을 ‘나라사랑’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묶는 ‘산민(産民)통합’에 앞장서야 되겠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자유총연맹에서 ‘자유’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담고 있다. 박정희는 근대화와 산업화로 국가가 부강해져야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자유를 지켜낼 수 있다는 데 착안했고, 김대중은 인권과 민주주의 구현을 통해 우리 국민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데 착안했다. 그리고 ‘총연맹’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가와 국민이 함께 힘을 모으는 ‘총력안보’가 이뤄질 때 비로소 남북통일과 한반도 평화가 구현될 수 있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 저의 오랜 목표와 방향성이 연맹의 존재 이유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잘 아는 여러 선배들로부터 ‘자유총연맹을 맡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됐다. 자유총연맹을 국민통합의 역동적 조직으로 재탄생시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통일의 선봉대로 그 위상을 올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선거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기사 이미지

2012년 10월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된 박정희 전 대통령 33주기 추도식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김경재 기획특보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지역 뛰어넘는 인재등용 통해 화합 구축할 터”
밖에서 본 자유총연맹은 어떤 조직이었는가?
“1954년 창설 이후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국민운동단체로서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겼지만 최근 들어서는 제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자유수호’가 아니라 ‘사익(私益)수호’에 치우치다 보니 회원들의 단합을 저해하고 조직의 사기를 극도로 떨어뜨렸다. 또 외부적으로는 실효성 없는 회원 확대정책과 실적에 급급한 나머지 부풀리기식 발표로 연맹의 대외적 신인도를 추락시키고 있다. 특히 사사건건 행정부와 대립하는 등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본다.”

선거 기간 상대 진영에서는 ‘관권선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관권선거’의 핵심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이뤄질 수 없도록 높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여러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행정자치부가 자유총연맹에 발송한 공문은 자유총연맹 내부에서 벌어졌던 ‘관권선거’ 기도에 대해 시정과 함께 공정선거 관리에 만전을 기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정관·규칙을 위반해가면서까지 회장직무대행을 임의로 지명하고, 입후보자의 자격에 대해 규정한 정관·규칙을 특정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한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관건선거 아닌가? 그런데 행정자치부가 그것을 시정할 것을 지시하고 공정한 선거관리를 촉구한 것을 두고 ‘관권선거’라고 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상급 감독기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존재와 활동 자체가 ‘관권선거’가 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해괴한 논리이고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청와대 홍보특보를 역임한 것을 제외하면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상속한 박근혜 정부에서 호남 출신이 자유총연맹의 수장이 됐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다. 또 그 당사자가 저 김경재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자 막중한 책임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그렇듯 자유총연맹 내부적으로도 지역갈등이 있고, 역사관과 안보관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저는 호남 대통령도 모셔보고 영남 대통령도 모셔본 사람으로서 지역을 뛰어넘는 인재등용, 중앙간부 및 지부·지회 임원들과 보다 친밀하고 세심한 소통과 신뢰구축을 통해 연맹의 화합과 중흥을 이끌어내고 싶다.”

자유총연맹을 ‘통일운동의 선봉대’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는데 어떤 구상인가?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과는 달리 오래 순항하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 다시 말해 짧으면 몇 년 내, 길더라도 10년 내에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거시적인 안목에서 대북정책을 세우고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는 올바른 이념과 역사관을 갖고 북한 주민들을 이끌어야 한다. 또 누군가는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이들과의 교류를 돕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체제 붕괴 속에서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의료·인도적 지원 등의 활동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준비하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국자유총연맹이 맡아야 한다고 본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났는데도 우리가 아무런 준비도 없고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면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에 의존하고 예속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고 또 다른 민족적 비극을 잉태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운동의 선봉대’를 연맹의 새로운 역할로 제안한 것이다.”

자유총연맹은 보수진영의 ‘맏형’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그들만의 리그’, ‘확장성 없는 수구보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총연맹이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지적을 받는 것 아니겠는가? 왜 ‘수구보수’라는 지적을 받겠는가? 관용과 포용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북좌파’라는 비판을 왜 받겠는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함몰돼 스스로 균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합리적인 제도의 틀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인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나의 이념과 노선이 보다 많은 사람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보수주의라고 생각한다. 자유총연맹이 명실공히 ‘통일운동의 선봉대’로 우뚝 선다면 그 누구도 연맹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와 역사가 연맹에게 부여한 소명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우리와 다른 주장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가 꿈꾸는 새로운 자유총 연맹의 모습이다.”


“임기 중 정예화된 100만 요원 만드는 게 목표”

기사 이미지

김경재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 후 ‘통일의 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일부 전임 회장이 ‘젊은 보수’, ‘건강한 보수’의 육성을 강조했음에도 성과는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유총연맹은 6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정도 세월이면 갓난아이가 환갑이 될 정도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보수’는 늘 공약 속의 레토릭(수사·修辭)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왜 그럴까? 기성세대 중심으로 연맹이 조직화되면서 단 한 번도 미래세대에게 연맹의 중심으로 도약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청년들을 하나의 액세서리 또는 ‘얼굴마담’ 정도로만 여길 뿐 이들이 주축이 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연맹이 주관하는 프로그램 중 비무장지대(DMZ) 국토대장정, 고교생 토론대회, 자유수호 웅변대회 등이 있다. 대단히 의미 있고 훌륭한 기획이다. 그런데 이들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된 젊은 인재들이 과연 연맹에서 꿈을 키우고, 역량을 쌓고, 잠재력을 발휘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돼 있는가? 그냥 한 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박수 받으면 끝난다. 오랜 세월 동안 연맹을 거쳐간 젊은 인재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런 부분의 개선이 필요하다. 이들이 연맹의 중심축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획기적인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유능한 변호사, 유능한 학자, 유능한 사회운동가들을 좌익단체에게 빼앗기고 있다.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진화하는데 자유총연맹을 비롯한 보수단체는 진화하지 못했다. 이들을 품을 수 있는 공간과 역할이 없기 때문에 인재육성 싸움에서 항상 패배하고 만다. 저는 통일운동에 버금가는 것으로 인재교육과 인재육성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자유총연맹이 보수진영 인재의 보고(寶庫)가 돼야 한다.”

일부 전임 회장이 고문료 등의 명목으로 과도한 ‘보수’를 받다가 적발돼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자리를 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교두보로 여겼던 분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개인적인 역량을 최대한 많이 비축하려고 했던 것 아니겠는가. 기본적으로 한국자유총연맹은 국민운동단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국민 운동단체의 수장은 그 누구보다도 높은 도덕성과 사명감이 필요하다. 연맹 지부 및 지회의 임원들과 간부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직 애국심과 명예만을 위해 활동하는데 중앙회장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옳지 않다. 저는 그분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일할 것이다.”

김 회장이 구상하는 자유총연맹의 개혁방안을 듣고 싶다.
“4월 중순 이후 취임식 때까지 한시적으로 ‘제16대 한국자유총연맹 회장직인수위원회’를 가동한다. 인수위에는 각계의 전문가 11명이 참여해 자유총연맹의 발전과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큰 틀에서 개혁방안은 ▷행정조직 슬림화▷여성과 청년의 역할 증진 ▷수익사업 투명화 ▷중앙본부 전 직원 북한 전문가 양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회장으로서 중앙본부 소속 직원들의 신분은 보장하고 복지·후생·장학사업도 챙기는 대신 지금부터 1년 후쯤에는 가혹한 평가를 할 계획이다. 잘하는 사람은 그만큼 상을 받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것이다. 직원들이 자유총연맹 소속이라는 명예와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조직을 다시 만들겠다.”

임기 중에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말해달라.
“DMZ 부근에 통일안보연수원을 만들고 싶다. 자유총연맹 회원은 물론이고 많은 시민이 이곳에서 자유롭게 강연을 듣고 체력단련도 할 수 있도록 하겠다. 뉴욕에 본부가 있는 유엔은 스위스 제네바에 제2사무국, 오스트리아 빈에 제3사무국, 케냐 나이로비에 제4사무국을 두고 있다. 그런데 세계 인구의 64%인 45억 명이 살고 있는 아시아에는 아직까지 유엔 사무국이 없다. 우리나라가 제5사무국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저를 비롯한 자유총연맹 회원들도 힘을 보태겠다.”

자유총연맹은 회원 수만 300만 명을 자랑하는 조직이다. 수장으로서 김 회장의 비전과 포부를 듣고 싶다.
“젊었을 때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지냈는데 귀가 따갑도록 들은 것이 ‘전쟁은 병사의 절대적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예화된 핵심 전투요원의 수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순신 장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왜군을 통쾌하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잘 훈련된 정예 수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러한 관점에서 연맹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우리는 북한 김정은 정권과는 휴전선을 사이에 둔 사실상의 전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총연맹이 승리의 선봉에 서기 위해서는 300만이니, 500만이니 하는 절대적 수가 아닌 소수 정예화된 100만의 핵심 전투요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는 3년 임기 동안 100만 정예요원 양성의 기틀을 마련하려고 한다. 100만 정예군만 있다면 북한의 급변 상황에서도 우리는 큰 걱정이 없을 것이다.”


“퇴임 후 박 대통령을 ‘통일 아이콘’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 후 ‘통일의 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인생 역정을 보면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한국전쟁의 한 가운데서(1952년생) 태어났고,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때 그 현장인 청와대에 있었고,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은 문세광의 흉탄에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마저도 측근의 배신에 의해 잃었다. 그리고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와 북한 핵개발이라는 초유의 국난이 정계입문의 계기가 됐고, 평화통일과 경제발전이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선을 계승·발전시켜달라는 염원을 업고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것만으로도 박 대통령은 ‘통일의 아이콘’일 수밖에 없다. 남북통일을 통해서만 아버지·어머니와 자신의 오랜 숙원을 모두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 박근혜’가 가진 조건 속에서 더 큰 잠재력을 발견하게 됐다. 2018년 퇴임 때 박 대통령의 나이는 66세다. 퇴임 후로도 10~20년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다. 나아가 남북관계와 동북아 평화에서 박 대통령이 갖는 상징성과 외교적 역량도 세계 어느 지도자와 견줘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박 대통령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자산과 비전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마을운동 전도사, 남북평화 특사, 유엔 평화활동 지도자 등이다.

자유총연맹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울 남산에 위치해 있는 연맹중앙본부(자유센터) 준공식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친필 준공 기념석을 남겼다. 당시 우리 건설 기술수준이 낙후돼 필리핀 기술자들을 불러야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조국 경제발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을 것이다. 그의 신념과 염원이 오늘날의 연맹을 있게 했다. 그래서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하면 연맹의 ‘종신 명예총재’로 모시고 싶다. 그래서 연맹이 자유수호운동 및 통일운동의 선봉에 설 때 박근혜 대통령과 그 보람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김 회장의 정치역정은 DJ에서 시작했지만 그를 핍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 대에서 변곡점을 맞았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그의 활약은 주목할 만했다. 최근 3년여 동안 방송 출연횟수 300회 이상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그는 박근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애썼다. 자유총연맹 회장선거 출마도 같은 맥락이라는 게 김 회장 지인들의 전언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작지 않은 조직을 맡았습니다. 제대로 하겠습니다.” 그의 말끝에 힘이 실렸다.

최경호 주기중 기자 squeeze@joongang.co.kr

기사 이미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