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옳을 수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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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변화는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변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면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오도된 변화는 불안과 혼란을 몰고 온다. 따라서 「적극적 변화를 통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안정을 지켜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모두 일면적 타당성이 있다.
이 두 주장 중 어느 한쪽의 주장이 절대로 옳고 다른 한쪽은 절대로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안정의 논리가 더 타당성을 지니는 상황도 있고 변화의 논리가 더 타당성을 지니는 상황도 있기 때문이다. 안정을 기해야할 상황에서 무리하게 변화를 추구하면 정국의 혼란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반대로 변화를 추구해야할 상황에서 변화를 주저하거나 기피하면 정국은 침체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지난 4∼5년간 우리는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했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 정국의 혼란은 가속화되고 급기야는 파국이란 종말로 치달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지금의 정국은 4∼5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정되었다. 정국이 안정되면 될수록 「안정의 논리」는 설득력을 잃는데 반해 「변화의 논리」의 타당성은 높아진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안정이 지속되면 어쩔 수 없이 침체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배타성, 다양한 것 이질적인 것의 조화와 혼재를 거부하는 획일성, 능률과 효율을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명령·복종체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고의 경직성, 그리고 상층부의 조그만한 변화가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작용하는 단세포성 등은 모두 침체의 국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2·12총선은 이제 변화를 추구해야할 때가 왔음을 가르쳐준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민주화」 「자율화」 「민의수렴」 「국회활성화」 「대화정치」 등 변화의 부위성을 구체화한 용어들이 매스컴은 물론이고 일반 시정인의 입에까지 쉽게 오르내리게 되였다.
그러나 침체한 정국을 활성화하고 경직된 정국을 풀어 탄력성을 주는 변화만으로 민주화와 자율화가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민주화와 자율화는 이견과 비판을 허용하고 이질적인 것, 다양한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의 주장, 남의 논리에도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자세로 민주화와 자율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것이 자가당착의 모순이다.
다시 말해 변화의 논리에 타당성이 있는 것과 같이 안정의 논리에도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안정의 논리에 단점과 한계가 있는 것과 같이 변화의 논리에도 단점과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은 변화의 논리가 더 설득력을 지니는 정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정의 논리를 주장해온 사람들이 비판과 이견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해서 변화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일방적 주장을 고집한다면 민주화·자율화와는 거리가 먼 악순환만 거듭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이 아니면 동지, 전부가 아니면 무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통용되는 사회는 탄력성도 신축성도 없는 사회다.
조그마한 충격과 자극에도 곧 흔들리거나 마비된다. 획일성과 단일성을 강요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집단의 경우 이질적인 것이 유입되어 들어갈 외부와의 통로만 열리면 쉽게 무너지는 취약성을 잉태하고 있다.
진정한 민주화와 자율화는 두가지의 선행조건, 즉 개방사회·다원사회의 체질과 대화의 정신을 갖추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첫째 금방 달아 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양철지붕의 체질을 개선하여 변화의 충격과 부작용을 스스로 흡수할 수 있는 내구력을 갖추고 둘째 평등한 수평적 관계에서 사리에 맞는 논리의 전개를 통해 대화의 상대를 설득하겠다는 자세를 갖추어야 정국의 변화를 민주화와 자율화로 유도할수 있다는 것이다.
명령과 규제로 이룬 타율적 합의는 제재의 효력이 정지되면 곧 와해되고, 편법과 조작에 의한 통치는 정국이 바뀌면 그 효력을 잃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무슨 새로운 발견처럼 소리높여 떠들어 대는 사람이 요즘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안정의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던 것같이 변화의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건설적인 비판과 우정있는 충고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 이질적인 것·다양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타적인 사람, 양철지붕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단세포의 인간은 어느쪽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계속 연재되어온 어느 일간지의 칼럼이 어느날 아침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솔직이 말해 나는 그분과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분과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의견도 용납될 수 있어야 탄력성있는 민주사회가 아닌가.
학원의 자율화를 부르짖는 소리가 캠퍼스 구석구석까지 메아리지고 있다. 그중에는 획기적인 개혁과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강변하는 극단적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학원의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의견도 용납되어야 진정한 학원의 자율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의견이 다른 의견을 압도할 수 있는 사회는 결코 개화된 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개방사회의 체질과 대화정신을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구하는 민주화와 자율화는 쉽게 붕괴될 허구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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